[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내포의 협객 권 옥
[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내포의 협객 권 옥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12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꺽정 장길산의 반성의 투영으로 나타난 협객상

  조선후기 무너져 가는 체계와 그틈을 이용하여 탐욕을 일삼는 관료와 지방 토호들의 발호는 민심이반을 불러 왔고 반동으로 민란과 소요가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내포지역은 1851년 예산 덕산의 상인들이 만든 예덕상무사가 한성부(상업은 한성부 평시서가 관리)의  공인 완문(공문)을 받을 정도로 내포지역은 물상은 풍성했고 팔도에서 물상교류를 하려는 상인들이 몰려 흥청거렸다.

시장에는 장꾼 상인 노무자 무뢰배인 왈자는 물론 장마당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구전을 뜯어내는 아전 포졸들의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이곳에 협객 권옥이 나타난다.

당시 내포 시장에는 호서 팔협이니 내포 오호니 하는 군상들이 있었으나 권옥은 단숨에 그들을 제압한다. 권옥의 활동상은 내포를 넘어 한양까지 퍼져나가 조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권옥을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운양 김윤식이다. 김윤식은 24살 때인 1858년 김겸산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남긴다. 김윤식은 7년후 초시에 입격하고 능참봉으로 초임벼슬에 나가 훗날 외무대신에 오른다.

김윤식은 1892년 내포 면천으로 귀양을 와 7년여를 보내며 면천 덕산 홍주 결성등에서 보고 들은 것을을 기록한다. 김윤식은 권옥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권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한양으로 돌아가 외무대신으로 복귀해서도 인연을 유지한다.

권옥은 임꺽정이나 장길산같은 군도(群盜)류의 인물이 아니다. 권옥은 상인들과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은 관과 아전들 그리고 시장을 위협하는 무리배의 횡포로부터 상인들과 백성들을 보호하고 성과도 있다.

김윤식은 권옥을 유협이라 한다. 김윤식은 총칼을 들고 행동에 나선 동학을 질타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관을 상대하고 때로는 권력을 징치하는 권옥의 행동에 고무되고 격려를 한다.

김윤식이 기록한 권옥은 내포의 시장을 권력과 폭력등 부조리로부터 보호하고 상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권옥에게 시장판의 무리배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권옥은 홍주의 목사와 아전배들 그리고 지역의 호족인 왕족까지도 추상같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행동이 명분과 의리에 맞은 때문일 것이다.

권옥은 의사(義士)다. 필자는 권옥에게서 조선시대의 진정한 협객상을 발견한다. 문화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내포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권옥이다.

권옥(權鈺)은 한양 사람이다. 할아버지 기(耆)가 정조임금당시 승지를 역임했다. 옥은 일찍 아버지가 죽어 선한 행실은 없으나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그 기임함을 세상이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거침없는 행동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 불과 같아 이웃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피했다.

옥은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이 본래 부유했으나 가난한 친척과 친구들을 구휼하느라 이미 바닥났다. 이때 내포가 살기 좋다하여 내포로 내려가 살면서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 날씨가 맑거나 흐리거나 항상 패랭이를 쓰고 다니면서 스스로 겸산(兼山)이라 부르니, 호서 지방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부터 저자에서 놀기를 좋아했고, 물가를 공평하게 중개하니 시중의 모든 상품의 교역은 오직 그의 말이 법이었다. 권옥은 내포 시장의 왕으로 그의 말에 교활한 상인들이 감히 물가로 장난을 치지 못했고, 사나운 하급 장교와 관리들도 엎드려 두려워했다. 권옥은 시장에서 조금씩 생겨난 이익금이 매번 수천 금이 되었다.

근방에 권세를 의지하여 횡포를 부리는 이가 있었다. 남의 묘지를 빼앗아 장사를 치렀지만, 묘지 주인은 항의하지 못했다. 옥이 그 집에 찾아가 천천히 위로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가 있으니, 공이 억울한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이에 글을 지어, 사방 행상과 떠돌이들을 불러 수천 명을 모았다. 산에 올라가 그 무덤을 발굴하여 관을 쪼개어 시체를 꺼냈다. 횡포를 부렸던 사람의 집에 갖다 놓고 꾸짖기를 “네가 모기같은 힘을 빙자하여, 죽은 아버지를 팔아, 부당한 복을 구하려고 하니, 오늘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네가 돈으로, 탐욕을 부리고, 더러운 관리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했다.

말이 나오자, 온 집안이 울음을 참고 소리를 삼키며 머리를 땅에 쳐 박고 숨을 죽였다. 옥이 돌아간 지 3일이 되어도, 아이들 소리가 문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후로 호남 사람들이 시체를 싣고 밤에 다니는 일이 없었다.

홍주에 사는 어느 부자가 왕자 집안의 묘를 수호했었다. 하루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고을 사는 선비를 때려죽이니, 그의 세 아들이 관청에 고발하니, 부자는 왕자의 집에 숨었다. 고을 수령이 사람을 시켜 찾으니 왕자가 허락했다. 구속하여 고을 감옥으로 보내니, 부자는 계략이 궁하게 되어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뇌물을 바쳐 면하려고 했다.

옥이 이를 듣고 즉시 선비의 집에 도착하여 돼지와 개라고 크게 부르니 세 아들이 놀랍고 두려워 문을 나와 옥을 보고 절하고 땅에 엎드렸다. 옥이 꾸짖기를 “지금 어떤 사람이 너희들의 아버지를 죽이고도 밝은 세상에 편안히 지내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세 사람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나약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천천히 다른 사람의 손을 기다리느냐? 저 사람이 하루아침에 돈을 내어, 송사하는 내용이 뒤집혀 판결이 끝나 감옥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오게 되면, 너희들이 비록 복수하려고 할지라도 가능하겠느냐?” 라고 말했다. 세 아들은 절하고, 통곡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옥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너희들은 할 수 없으니,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겠다” 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을 보내 다시 전날 불렀던 사람들을 부르니, 정오에 주 관청 문 앞에 구름처럼 모였다. 함께 문을 파괴하고, 세 아들이 들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세 아들이 앞 다투어 배를 갈라 간을 꺼내어 씹고 또 씹었으며, 머리와 허리를 자르고, 사지를 찢으면서. 춤추고 뛰다가 돌아왔다. 고을 사람들은 어엿한 행동에 통쾌하다고 했다.

처음 고을 수령은, 권겸산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고을 아전들에게 망동하지 말도록 단속했다. 세 아들이 원수를 갚는 옥사는 마침내 무사했다. 이때 감사와 수령들이 예법을 지키지 않는 이가 있으면, 옥이 길에서 만나 꾸짖고 욕하니, 감사와 수령들은 모두 귀를 막고 지나갔다.

옥의 성실은 의협심이 있어, 아첨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미워했고, 부호들을 능멸했다. 남의 어려움을 들으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이르는 곳마다 빈곤하고 미약한 사람들이 장성처럼 여겼고, 재앙과 어려움을 당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기다리는 듯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