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칼럼] 매천 황현의 독설
[충청역사칼럼] 매천 황현의 독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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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 황현(1855-1910)은 구한말의 절의다. 33세에 과거에 급제를 하고 작은 벼슬을 전전하다 임오, 갑신정변을 보고 고향 장수로 내려가 독서와 글쓰기로 세월을 보내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아편을 다량 복용 하고 자결을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절명시는 나라의 운명이 다한 시대에 태어난 조선 지식인의 고뇌와 무력감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과 오하기문등 여러편의 저작을 남겨 연구자들을 설래게 한다. 구한말의 풍운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에 당 시대를 재구성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매천야록은 황현이 지은 산문으로 매천이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기록 하고 있는 일종의 만록(수필)으로 내용을 보면 조소와 해학 그리고 저주가 가득하여 독자들을 당혹케 하기도 한다. 매천의 절명시에 보이는 담대함과 보수적 인식과는 딴판이다.

새와 짐승도 슬퍼하고 산과 바다도 얼굴을 찡그리오.

무궁화 삼천리 망하고 말았구료.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헤아리니.

세상에 책 읽은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하답니다.

매천야록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이 시와는 다르게 매천야록 전편은 당대의 한다하는 인물들에대한 조롱과 질시로 가득 하다.

특히 대원군 이하응에 대한 그의 시각은 조롱을 넘어 저주다.
운현(대원군) 부인 민씨.
부대부인은 민치구의 딸로 대원위와 금슬이 좋았다. 갑자년(1864) 이후로 종종 정경부인들과 사대부의 여자들을 집으로 초빙을 하여 질탕 하게 놀았다. 그녀들중 미모가 있는 여자들을 골라 대원군과 동침케 하고 동침녀들의 남편이나 가솔의 뒷배를 봐주었다. 조야가 모두 이를 비웃었다.

매천은 대원군을 공박하다 못해 그의 부인까지 불쌍녀로 몰아 부친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이런 기록은 정도가 심하다. 더구나 매천 자신의 경험담도 아닌 풍문이란 것을 믿고 이렇게 기록한다는 것은 골계미를 추구 하는 야록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매천은 아에 대원군의 장자 ' 이면'도 손속을 봐주지 않는다.
이재면.
이재면은 민씨들과 결탁하여 (민비의 편을 들었다는듯) 일을 성사 시킨 후 재미는 민승호가 혼자 보고 닭좇던 개 지붕 쳐다 보는 격이 되어 혼자 민승호를 욕을 했다. 그 사정을 들은 대원위가 '에라 ! 돼지 새끼로다' 했다.

매천의 기록은 매우 불공편 하다. 대원군과 그 일족에 대한 기록은 이렇듯 가혹 하면서도 면암 최익현에 대해서는 정중 하다 못해 과공비례다.
최익현이 늙은 아버지를 봉양 하며 손수 채마밭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익현의 전집 20권 전체를 통독한 필자는 초익현이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을 한줄도 보지 못했다. 최익현의 부모도 일찍 죽은편이다.
일이 이 모양이라 하여 매천의 진정성이 저하 되는 것은 아니다. 다소간의 개인 감정이 녹아 있기는 해도 매천야록 전편에 보이는 비평정신과 우국 충정은 놀랍고도 아름답다.

매천은 고향 장수에 있을때 장문의 바둑시를 한편 짓는다. '상산사호기'가 그것이다.

네 사람의 눈썹과 머리털이 서로 비슷한데

네 사람의 바둑 두는 모습은 다르구나.

한 노인 한수 두고 다시 의심치 않는데

다른 노인 손을 들어 착수할 염두를 내지 못하네.

매천은 바둑을 도교의 풍류로 인식 하고 바둑으로 나마 구한말의 고뇌를 달랬던 듯 하다. 매천 황현 그가 꿈꾸던 바둑속의 네 노인 오늘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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