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칼럼] 홍주에 왔던 암행어사
[충청역사칼럼] 홍주에 왔던 암행어사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2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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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기까지 하던 감찰이 작동했어도 망국으로 치달은 조선 미스터리

조선 후기 성군으로 평가되던 정조가 사망한지 8년 후 충청우도 암행의 임무를 뛰고 내려왔던 김상휴(1757-1827)의 활동상을 보면 당황스러운 한편 경건하기까지 하다.

순조시대는 삼정이 무너지고 탐관들의 발호로 조선이 망국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다.그러나 김상휴의 암행과 지역 행정의 감사결과는 전혀 다른 논점을 제시한다.  김상휴는 46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4년만에 종6품관으로 승차한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는다.

김상휴는 명을 받는 즉시 경리 아전 한명과 군관 두 명을 지원 받아 남양 천안 아산 해미를 거쳐 서천과 남포현을 돌아 홍주에 들어온다.  김상휴의 노정이 갈지자인 것은 행로가 예측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걸음으로 생각된다.

김상휴는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천안과 아산의 포구에 대해 언급한다. 그 시대에 배가 천안까지 드나들었다는 대목이 주목 된다.

제가 암행할 때 천안 지역을 두루 거치면서 크고 작은 백성들의 상황을 자세하게 탐문하였습니다. 천안에서는 전세를 직접 납부 받지 않고 아산(牙山)으로 운송해서 납부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궁핍한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주는 폐단이기 때문에 제가 그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천안의 시포(市浦) 포구가 너무 좁고 또 밀물의 힘이 약해서 큰 배는 정박할 수 없고 겨우 작은 거룻배 정도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대동세(大同稅)는 천천히 올려 보내도 되기 때문에 작은 거룻배로 조금씩 나누어 싣고 쭉 늘어서서 직산(稷山)의 계양포(桂陽浦)로 옮겨서 그 쪽배에 덧붙여 실어서 상납하였습니다.
전세(田稅)의 경우는 기한이 촉박한 관계로 지연할 수 없어서 아산(牙山)의 공진창(貢津倉)으로 운송하여 납부하게 한 것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성록)

김상휴는 천안 백성들이 대동미 운반에 노고가 많다며 포구로써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시포를 정비하여 천안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줘야 한다 건의를 한다. 김상휴는 서천에서 출도를 한다. 서천군수의 비행이 심각하다는 이유였다.

김상휴는 홍주에 들어온지 3일만에 다시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고 그의 보고에 홍주목사 한흥유가 파직은 물론 투옥까지 된다.

홍주목사가 지역 토호 조석현과 죽이 맞아 백성들을 침탈하여 9백냥을 갈취하고 지역 양민의 여식을 강제로 혼인 시키려 하는 등 관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윤상휴의 감찰에 충청 우도의 군수 현감들이 십여명 파직 또는 투옥 된다. 투옥 홍주목사 한흥유 서산군수 이경덕 보령현감 한희연 비인현감 장재현 삭탈관직 대흥군수 서유령 공주영장 이락등이다.

김상휴는 진잠현감 이장휴를 극찬 한다. 고을이 작아 백미 5말에 불과한 녹봉을 받으면서도 6년간 고을 원을 하면서도 고을의 온갖 폐단을 개혁했으니 이 사람에게 상을 줘야 보고했고 조정은 그에 화답 이장휴를 승차시켜 요직에 발탁한다.

김상휴는 금정찰방이 퇴락한 관아를 백성들 추렴을 받지 않고 잘 보수 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한다.

김상휴의 암행일기는 의식이 있는 조선 관원의 생생한 분투기다. 20여개 고을을 감사하여 두명중 한명꼴로 투옥 파직시킨 감사능력은 탁월하다. 그런데도 김상휴는 칭찬 대신 본인도 탄핵을 받는다.

김상휴가 부여받은 암행지역외의 관료들을 보고서에 언급했다는 이유다. 권한남용이란 것이다.

엄격한 조선시대 행정의 한 단면이다. 김상휴는 훗날 조정 요직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까지 오른다. 그의 공적비가 경상도 지역에 산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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