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최후의 날 정림사지석탑은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최후의 날 정림사지석탑은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 이 청
  • 승인 2019.07.29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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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으로 남아 역사가 되어 사고(史庫)에 보관되고 유적은 자료로 남아 오늘과 내일을 기약한다.

부여 정림사지에 있는 오층석탑은 국보(國寶)라는 '탑파'의 예술성을 넘어 백제(百濟)의 망국을 지켜보고 자신의 몸을 빌려주어 백제 최후의 날을 오늘에 전해준다.

비문은 백제망국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주지육림에 빠져 호랑방탕했다는 허접(?)한 역사가 전혀 엉뚱한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의자왕이 곧은 신하들의 간언은 물리치고 요사스런 부인의 말을 쫓아 어진 자에게는 강한 형벌이 내려지고 아첨하는 자에게는 총애와 신임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때 해동의 군자로 평가되었던 의자왕의 허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문은 의자왕의 호랑방탕보다는 부인인 왕비 은고(恩古)의 정치탐욕을 보고한다. 은고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의자왕의 부인의 이름으로 일본서기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660년 3월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경기 서해안에 있는 '덕물도'에 상륙한다.

당군과 보폭을 맞춘 신라군은 5월26일 김춘추 김유신이 이끈 5만 대군으로 경주를 떠나 백제의 '사비'로 진격한다.

양군은 7월10일 사비성 앞에서 합군할 것을 군기(軍期)로 약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군기는 지켜지지 않았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결사대에 신라군이 발목을 잡혀 백병전을 치르고 있을 때 당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라와 사비강변에서 상륙을 막아서는 백제군을 격퇴한 뒤 사비성을 포위하고 신라군과 조우한다.

황산벌에서 패퇴한 백제군의 저항은 무력했다. 더이상의 이렇다할 전투도 없이 백제는 7백년 사직을 접는다.

660년 7월12일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날이다. 이미 웅진으로 도피를 한 의자왕과 왕자 '효'를 제외한 왕자 '융'과 좌평들 중 수장인 '사택천복' 등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여 7백년 백제의 사직이 무너진다.

당나라군대의 총관인 소정방은 웅진에서 자진투항해온 의자왕을 비롯 7백여 명의 백제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당나라에 끌고가면서 사비성의 중앙로에 우뚝서 있던 오층석탑에 깨알같은 비문을 새겨 넣는데 그것이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이다.

비명은 백제의 마지막 국운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자료 1) 이에 흉악한 무리들이 이 궁벽지고 험한 곳을 지키고 앉아 (천길) 매달린 줄이 끊어져 무겁게 떨어지고 쌓아놓은 바둑돌처럼 위태롭게 있으면서 구정(九鼎 하은주 삼대의 보배로 중국의 보물을 일컷는 말)으로 칠 줄을 알지못한다.

(以此兇徒, 守斯窮險, 不知懸縷將絶, 墜之以千鈞, 累碁先危,壓之以九鼎. -당평백제비)

당은 백제공격의 명분을 오랑캐의 무리로 돌리고 있다. 백제는 천길벼랑에 매달린 줄도 모르고 쌓아놓은 바둑돌처럼 위태로웠다 말하고 있다.백제 최후의 순간을 기록한 장면에 포착된 루기선위(累碁先危- 위 비문의 굵은 글씨 )가 눈길을 끈다. 이 기록은 문자로 된 한반도 바둑관련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한반도의 바둑관련 기록은 (작성의 시점에서) 상한연대가 모두 7-8세기를 넘는다.오층석탑의 바둑기록은 연남생 묘지명 바둑기록보다 오십년을 앞서는 기록이다.한반도의 고대 바둑기록은 중국의 25사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여러가지 모습으로 등장하여 이 땅에 이미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던 바둑을 증거한다.

탑비에 새겨진 글자는 무려 2천여 자로 당시의 명필인 권회소(權懷素)의 필체가 돋보인다. 오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에 있는 국보9호로 백제석탑의 원형으로 평가되는 예술적인 탑으로 평가된다. 바둑돌을 쌓아놓 듯(累碁) 위태롭다는 말은 중국고대의 기록에 빈발하는 말로 '고려사'에도 루기지난(累碁之難)이라 하고 조선실록에 고종은 국세위녀루기(國勢危如累碁)라 하며 나라의 실정이 바둑돌을 쌓아놓은 듯 위급하다 고백할 정도로 바둑을 정치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백제는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바둑이 유행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때 세워진 익산의 미륵사지에서도 수십 점의 바둑알이 발굴된 바 있다.

비록 당나라군이 백제수도의 상징적 의미였던 오층석탑에 새긴 아픔이자 치욕의 기록이지만 당시 백제와 당나라에 바둑을 매개로 한 문화인식이 없이는 결코 써넣기 힘든 문장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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