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충청 면천 고을의 아전으로 조선의 대시인이된 사람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충청 면천 고을의 아전으로 조선의 대시인이된 사람
  • 이 청
  • 승인 2019.07.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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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집 그를 말하다.

유한집(兪漢緝 생몰연대 미상)은 1797년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 20대 초반의 아전 신분으로 연암 박지원의 눈에 들어 그에게 공부를 한 사람이다.

유한집은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글에 이름이 처음 등장한 백년 후 1903년 면천 영탑사 아랫마을화정(김윤식은 영탑사에서 2년여를 살다 화정에 집을 짓고 가족을 대동하고 5년여를 살았다)으로 귀양을 왔던 김윤식의 일기인 속음청사에 다시 그 이름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유한집의 손자인 유지환이 할아버지의 시집을 들고 와 김윤식에게 보인 것이다. 김윤식은 유지환이 면천의 아전이라 했고 김윤식은 시집을 모두 읽고 만고의 작품이라 평가를 했다. 이 책이 심경호에 의해 세상에 소개 됐다.

유한집은 1827년 천안군수를 하던 심노승을 찾아와 안면을 트고 심노승은 그의 시를 보고 시재가 출중하다 하며 그가 면천에서 대를 이어 아전을 하는 집안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유한집이 면천 출생이고 그것도 수백 년 토박이임이 확인된다. 유한집은 조선후기 출간된 유수한 시집인 ‘대동시선’과 ‘풍요삼선’에 7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이로서 유한집은 아전에서 군수 박지원의 지도로 조선의 시인으로 변모하는 인간성장의 스토리텔링을 이루었다.

가는 골격 나는 몸매 항아처럼 요염해라. 높은 무대 위 애절한 노래 진동하네 명원의 가인들 넋이 나가 앉아 있고 기방의 기녀들 누굴 보려 이리들 왔나 진정 애절하다 오동추야 밝은 밤에 상사를 노래하니 어찌할 줄 모르네. 유한집이 한양에서 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공득이'라는 어린 남자 가수를 소개한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한양의 각 관아의 여관들과 한양 기생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친 모양이다. 오동추야(梧桐秋夜)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조선후기 사랑가로 자리잡은 유명한 가사다. 유한집의 시는 40여 편 전하는데 그 중 그의 고향 면천 근방을 노래한 시 한 편이 극적으로 있다. 뱃길도 끊어진 명나라 길. 빈 뗏목이 북두성을 침범하니 무너진 역원만 남아 남가새 보리만 푸르구나. (海斷朝天路. 空犯斗星. 今餘廢院 霽麥自靑靑)

면천에서 관아의 아전으로 인생을 시작한 유한집은 군수로 내려온 박지원을 만나 그에게 글을 배우고 아전직을 털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 풍파를 겪는다. 오늘을 안 살고 내일에 살겠다는 정신으로 아전이란 현실에서 넓은 세상으로 진출한 유한집은 김이양 김기서 등 박지원의 지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점차 조선의 시인으로 성장한다. 김이양은 박지원보다 16살이나 아래였으나 박지원이 마지막 대면한 충청관찰사다. 그러나 오히려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이다. 김기서 또한 박지원을 공경한 문인 관료로 평생 유한집을 돌봐준다.

이런 도움으로 유한집은 조선의 유수한 시집에 시가 수록될 정도로 문명을 얻는다.

유한집은 박지원이 만든 또 하나의 북학이다. 북학은 애초부터 세상을 차별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로 부터 시작된다. 하늘과 나는 차이가 없다(天我無間)는 생각은 북학보다 수백년이나 전인 퇴계선생의 사상이지만 현실에 적응한 사람은 박지원이고 그의 학파들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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