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칼럼] 삶을 넘어 시대를 넘어 택리지 이중환의 삶과 미래
[충청역사칼럼] 삶을 넘어 시대를 넘어 택리지 이중환의 삶과 미래
  • 이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2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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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이야기를 쓰며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김철도찰방 선생안에 그 이름이 있다고 먼저 말 한바 있다. 그러나 그가 목호룡 사건에 연류 절도에 안치 되었고 또 방면 되었다는등의 얘기는 있으나 정확히 그가 왜 무엇때문에라는 육하원칙상의 진실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그저 그를 칭송하고 험담(?)하는 온갓  필자들의 소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承旨持公事, 玉堂召對, 同爲入侍。 承旨吳命恒奏: “平安、黃海兩兵營銀貨, 多爲凶逆輩私用。 罪人雖頑忍杖斃, 而數多公貨, 豈容爲逆家富饒之資? 貪贓者亦有籍沒之規, 請籍其奸贓, 以補兩西勑需。” 上從之。 玉堂吳命新、尹游等, 因文義, 以無私二字, 縷縷開陳。 命恒繼陳其義, 仍曰: “向來吳瑞鍾、柳慶綏之竝爲按鞫, 亦出於嚴防邪逕之意。 聞李重煥爲金泉察訪時, 以驛馬借之睦虎龍, 稱以見失, 而其後推得於逆賊天紀家云。 此事極涉可疑, 人言喧藉。 而臺閣無一言, 備局差郞廳, 銓曹擬騎省。 請以此申飭銓曹。” 上可之 조선실록.
 

위 기록은 경종실록의 이중환의 관련 부분이다. 대략은 이렇다. 승지 오명항이 왕에게 아뢰기를 서북 지방의 군사비용을 역적질을 하던 집안이 사용 할 수는 없으니 이를 모두 적몰 하여 양도의 비용으로 사용케 하고 ... 이중환이 김철도찰방에 있을때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주고는 잃어 버렸다고 하다가 그 말을 역적 김(?)천기 집에서 찾았다고 했으니 이는 심히 의심 스러운 바 마땅히 살펴 보아야 하는 데도 그러하지 못했으니.  이인좌의 난을 징압한 오명항은 이중환과 목호룡의 연관을 집요하게 건의 하고 있다.    

이 때 이미 목호룡은 사형에 처해진 상태였고 이중환은 근신 상태였던 모양이다. 아직은 이중환에게 판결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였다.   

목호룡은 궁인 내시 그리고 시정의 여러 군상들을 모아 환국(정권 교체)을 시도 하다 처벌된 상태였고 그를 심문한 초서(공초)에 이중환과 어울려 타인의 묘 자리를 보아 주는 등의 행적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단히 정확한 기록의 결집체다. 왕의 체통에 관한 부분도 조금도 제한을 두지 않고 기록 하고 있기에 하급 관원들의 기록에 침소봉대나 사정을 봐 주는 식의 기록은 절대로 일어 나지 않는다.

혹자들은 왕조실록이 통치의 차원에서 왜곡 되고  편찬되었다는 막연한 추측과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물지 않은 연장(?)을 들고 장가를 가 아이를 낳으려는 꼴이다.  어느 왕조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실록을 두 번만 편찬 했다면 조선의 사정과 시스템상 실록 편찬은 그것으로 끝장이 났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중환은 역적으로 몰린 목호룡의 협조자가 맞다.  협조의 이유를 알기에는 기록이 너무도 없지만 택리지상에 나타난 그의 마음으로 미루어 세상에 대한 답답함과 출세에 대한 조급증이 부른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중환은 28세에 종6품 관원인 찰방이었다. 종6품은 작은 고을의 사또를 할 수 있는 벼슬로 나이에 비하여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 난 남인이기는 하나 관찰사등을 역임한 부친으로 인해 집안 또 한 부유 했을 것으로 판단 된다. 그런 이중환이 목숨을 건 모험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 해야 할까. 이중환은 이로부터 수년간 귀향 살이를 하고 방면 되어 정처 없는 부표의 삶을 살게 된다. 무려 30년의 떠돌이 생활이다. 그가 말년에 공주 북쪽에 사송을 짓고  강경을 오가며 택리지를 쓸때까지 그의 삶은 비애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주어 지지 않는다.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집안이다. 그의 문도라고도 할 수 있다. 성호는 조선 시대를 통 털어 가장 박식 했던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다. 정약용도 그를 따를 수 없을 정도다. 성호는 이중환을 이렇게 평가 했다. 근기가 있고 무얼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아깝다고...

이중환은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무엇이 아까운 인생이었을까. 사실은 성호의 말은 이중환 보다 자신에 국한한 말인듯 하다. 그 또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그 방대한 성호세설을 쓰지 않았던가. 조선의 선비들은 경륜을 얻어 세상에 펼치고자 했고 여의치 않으면 저술을 남겨 세상의 등대가 되고자 했다.

이점에서 이중환과 성호 이익은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경륜을 세상에 펼치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죽은 3백년 후에도 이렇게 인구에 회자되며 토론되고 인용 되고 지침도 되고 있지 않은가.
오늘 다시 택리지를 읽었다. 이중환의 충청도 기행을 통하여 그의 생각과 사상의 일단도 엿보았다.

물론 필자의 과문과 독해력의 결핍으로 이중환의 일면을 겨우 살펴본 것에 불과 하다. 이 점은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송구 하다. 그러나 이 말은 하고 싶다.
이 장에서 이중환의 평가는 유보 하자. 그의 평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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