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주류성(周留城)은 어디인가.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주류성(周留城)은 어디인가.
  • 이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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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향토사학자의 눈물겨운 분투를 기억하자.

661년 4월 청양 정산의 두릉윤성에서 대패를 한 신라군은 당 군과 더불어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 하기에 이른다.

사기가 오른 백제광복군이 일본에서 지원을 오는 왜군과 합세를 하기전 제압을 하려는 작전을 구상한다. 신라군은 웅진으로 전력을 진출 시켜 웅진과 신라의 교통을 막고 있던 광복군의 금강 동쪽 기지인 진현성과 내지산성(유성)을 공격 함락하여 웅진도를 뚫고 주류성 공략에 나선다.  구당서에는 이 당시 신라군과 당군 지휘부의 작전 내용이 전한다.

양군은 군대의 이동로를 놓고 토의를 벌인다. 웅진강을 따라 주류성으로 진격 하려면 가림성(加林城)이 장애물로 등장 한다. 가림성은 부여의 성흥산성으로 비정된다.  가림성을 함락 시키자는 주장과 험지는 피해 간다는 병법에 따라 우회 하여 진격 하자는 방안이 나온다.

선택은 가림성을 피해 가는 것으로 결정 된다. 나당군은 육군과 수군을 나누어 주류성으로  집결 한다. 수군은 일본에서 오는 왜군을 막기 위한 군대다. 7월에 웅진을 출발한 신라군은 웅진강과 백강의 경계지인 반여울을 도강 하여 두솔성으로 다가 선다. 두솔성은 두곳성이라고도 불리는 칠갑산 정상에 있는 성이다. 이때의 신라본기는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함께 함락 한것으로 나온다.이곳에서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주류성의 비정을 놓고 벌이는 학계의 첨예한 대립이다. 주류성의 위치를 놓고 한산설 부안설 홍성설 연기설이 등장한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대장이듯 부안설이 힘을 얻는 듯은 하다. 어떤 학자는 두릉윤성이 아에 주류성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주장의 근거라는 것이 그저 개인 의견일뿐이다.
주류와 두릉이 비슷하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편은 열기현을 윤성 또는 두곳성이라 뚜렷 하게 적고 있다. 학자들의 주장의 근거로 비슷한 음독 한자란 이유로 주류성과 두릉

윤성이 한 성이다라는 주장은 실망 스럽다.  구당서와 삼국사기 전투기를 정리해 보면 당시 신라군은 웅진을 출발 가림성을 피해 금강을 도강 두솔성(윤성)을 공파 하고 주류성으로 진출한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에 상륙한 일본군은 백촌강 전투에서 괴멸된다. 

웅진 ㅡ 탄진으로 도강(탄진은 탄천에서 청남쪽으로 금강을) ㅡ 두솔(윤성)ㅡ 주류성 ㅡ 임존성.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전투 기록은 공주 이인 ㅡ 정산 ㅡ 청양 ㅡ 홍성 ㅡ 예산로로 바꿀 수 있다. 공주 ㅡ정산 ㅡ 부안 ㅡ 예산로는 너무 멀고 길다. 가림성의 일단의 광복군도 두려워 하던 나당군이 당시 최대 최강이던 임존성을 뒤로 하고 부안으로 내려가 다시 회군 하여 북상 한다는 작전은 말이 않된다.

이점을 지적하며 홍성설을 주장한 재야 사학자 박성흥옹의 분투는 놀랍다. 주류성의 논쟁을 촉발한것은 일본역사서 '서기'의 내용이다.  천지 원년조에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 하기에 적합치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옯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을 따라 학자들은 부안에 있는 한 성이 부합한다 주장 한다. 피성은 김제 벽골제를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두루라는 뜻의 한자어인 주(周)와 머무른다는 류(留)의 뜻으로 볼때 주류성이 이리 저리 옯겨 다닌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본서기에도 옯겼다는 기록이 있지 않은가. 부안설은 일견 그럴듯 하지만 작전 개념이라는 상식선에서 무리가 있다. 정벌군의 역사적 이동 사실에 대한 똑 떨어지는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한산의 건지산성은 현장이 도무지 일본서기와 동떨어져 신빙성이 없다. 특히 백제매장문화재 연구소의 발굴 조사에서 성의 최고 연대가 고려 시대를 넘지 못한다는 연구가 나와 날 샌 설이다.

연기설도 비슷하다. 그런데 홍성의 학성산성설이 주목을 끈다. 홍성설은 박성흥옹이 필생을 기울여 한국 역사 학계에 던진 선물이다. 박옹은 홍성 장곡면에 있는 학성산성이 주류성이라 단정을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지에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이 지심주로 바꾸었다는 기록을 주목한 재야 학자는 학성산성이 일본 서기와 부합 하고 백촌강이 금강이나 동진강이 아닌 아산만 일대라는 논지로 재야 사학자가 정통 사학의 논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이를 근거로 홍성군은 역사 학계에 정식으로 발굴을 신청 했고 학계는 학성산성을 발굴 백제 시대의 사시(沙尸)라는 명문와당을 수습한다. 사시는 백제 시대 이 지역현의 이름이다. 학성산성이 백제 시대의 성임을 규명한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주류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여 주류성이라 인정 할 수 없다는 자세를 취했다. 

변화무쌍한 전투시에 주유라는 와당을 구워 건물을 지을 여유가 있었을까? 오히려 사시라는 와당이 나온것이 학성산성이 주류성이라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김정호의 기록을 주목한다. 당나라때 지심주라고 지명을 고쳤다는 기록 말이다. 지심주는 60년대 중국 북경 부근에서 발굴된 난원경묘지명에 보이는 백제의 지명이다. 난원경이 당나라때 중국에 와 요서에서 달솔을 지내며 살았는 데 고향이 지심주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김정호의 기록의 정밀성을 말한다.

신라군은 8월17일 주류성을 포위한다. 주류성과 지척인 백촌강에서는 일본군이 당군에 와해된다. 8월28일이다. 주류성은 9월7일 함락된다. 그리고 신라군은 10월21일 임존성을 공격 하기 시작 한다. 임존성은 30일간 전투를 펼치며 성을 잘 지켜낸다.

신라군은 드디어 퇴각을 하고 바통을 이어 받은 당군이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성안에서 빼내는 공작을 성공 시켜 임존성을 함락 시킨다. 664년 초에 이르서야 나당군은 백제를 완전 제압한다. 무려 4년간에 걸친 백제 광복군의 분투기는 너무도 허망하게 끝을 본다.

그것도 전투에서의 패전이 아니라 지휘부의 자충수라는 것이 너무 아쉽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풍은 복신을 살해하며 뜨겁게 달아 올랐던 백제 유민의 충혼에 찬물을 끼얹은 지휘부의 정치싸움이 결국 백제의 망국의 원인으로 다가 온다. 주류성은 홍성 학성산성이 맞다고 본다. 그래야만 7세기 백제 일본 신라 당 4국이 벌인 광복군 진압전과 백촌강 전투의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 된다. 한 재야 사학자의 눈물겨운 연구 성과가 이루어낸 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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