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서천군 서면 부사리(扶史里)
[지명유래] 서천군 서면 부사리(扶史里)
  • 류신 기자
  • 승인 2023.04.1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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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리는 용굴재를 중심으로 얕은 산들이 앞뒤로 마을을 감싸 안으며 해풍을 막아주고 있어 바닷가 마을인데도 무척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외난(外難)이 있을 때는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는 마을은 온 주민들이 한지붕 밑 한 가족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정스럽게 살고 있다. 일제 때 간척사업으로 일구었다는 터전에서 거의가 농업에 종사하며 부사방조제를 건설하기 전까지 마을 앞 바닷가에서 어패류를 채취하여 풍요를 누려왔다.

부사리는 대부사와 소부사로 나뉘어지며, 백제 때 비중현에 속했었고, 신라시대 서림군의 영현인 비비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임천의 비인현 소속이었다. 1413년에 비인현 이었을 당시에는 큰 마을을 이룩하였던 지역이었으므로 부사면이라 하였는데, 조선 말 비인군 서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명동리, 내월리, 개야리 일부를 합하여 부사리라 해서 서천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서낭댕이 서쪽마을을 부사면이라 하는데, 오래 전부터 형성된 큰 마을이었다. 적은 부사면 북동쪽 옆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명동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맑은 햇빛에 수려한 들과 산을 끼고 자리해 있다 해서 명동(明洞)이라 했다고 한다. 적은 부사면 서쪽으로 있는 산을 배보는재라고 하는데, 산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배나 해변에 매달아 놓은 배를 보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사면 동쪽에서 월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댕이라 하는데, 옛날부터 성황당이 이곳에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하며, 이곳은 용처럼 생겼다 하여 용굴재 라고도 부른다.

부사리에 장잣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장자(長者)가 살았던 마을로 크게 세도를 부렸던 마을이라 장자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했다 하며, 부사면 동쪽을 적은 장잣골, 서쪽을 큰 장잣골이라 부른다.

대부사 마을 앞바다에는 할미섬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사간척지 안에 들어 그 형체가 없어졌으며, 할미섬은 마을 뒤에 있는 배보는재와 어울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한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이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 손자가 효성이 지극하여 배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할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할머니는 손자가 배타고 고기잡이 가면 배 보는재에 올라 손자 오기만 기다렸는데, 어느 날 손자가 타고 갔던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할미섬 근처에서 죽고 말았다. 그 할머니는 손자가 죽자 그 섬에 들어가 울며 그 넋을 위로하다가 죽었는데, 그 후 그 할머니는 삼신할머니가 되어 가끔 이 섬에 나타났다 하며, 그로 인해 그 섬을 할미섬이라 부른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미섬이 없어져 말 그대로 전설의 섬이 되고 말았다. 또한 할미섬이 있었던 맞은 쪽에는 샘금이라는 샘이 있는데, 옛날에는 금이 나왔다 하며 그 샘에서 치성을 드려 아들을 낳았다는 할머니가 칠석날이면 그곳에 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부사간척사업으로 부사방조제가 생김으로 인해 어패류를 채취해서 상당한 소득을 올렸던 마을사람들이 수 백 년 동안 내려오던 그 생계 터전을 잃고도 어업권을 취득하고 있지 않아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부사방조제 사업은 보령군 매립면적이 1천8백87㏊이며, 부사지구가 1천2백21㏊이다. 마을에 효자 이재원, 이재정처 유인 청송 심씨 지려가 있다.

이들은 부친이 병환이 나자 낮이나 밤이나 탕약을 올리며 간호하느라 의복을 벗어놓고 편히 쉬지도 못했으며, 날이 갈수록 병환이 더욱 심하여 백약이 무효라 심지어는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다. 부친이 생선을 원하였으나 겨울이라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어 도둔포에 갔으나 구하기 어려워 빈손으로 돌아오다가 바닷가에서 해가 저물었는데, 얼음 언 웅덩이에 숭어 두 마리가 있어 잡아다 봉양했다.

또한 부친의 병환에 노루고기가 효험이 있다 하여 노루를 잡으러 산에 갔으나 구하기 어려워 울며 돌아오는데, 마침 하늘이 도왔는지 노루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사로잡아 부친의 병환에 효과를 얻었다. 또한 어머니도 이처럼 봉양하다 병세가 깊어지자 임종에 이르러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여 두 달이나 명을 연장케 했다. 돌아가신 후에도 호상과 장례의 예를 갖추고, 매일 성묘하며 3년을 한결같이 하여 인근 마을에서까지 칭송을 들었다. 이에 당시 사림(士林)들이 고종임금에게 문서를 보내어 정려를 세우도록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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