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천태2리
[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천태2리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11.11 15: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민들의 삶과 함께 호흡한 천태산(2)

 

현재 남아있는 건물형 막사의 모습.
현재 남아있는 건물형 막사의 모습.

천태산에는 아직 탄광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태산 곳곳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막사를 볼 수 있는데 막사는 덕대머리나 작업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식사 및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막사 근처에 쇠말뚝 두 개가 녹슬어 있어 언뜻 보면 나무처럼 보인다. 쇠말뚝은 돌을 뚫는 착암기의 동력 엔진인 발동기를 놓았던 곳이다. 발동기 회전 바퀴는 공기압축기와 연결된다. 발동기가 돌아가면 회전의 힘으로 공기압축기가 작동한다. 공기압축기와 착암기는 호스로 연결되어 있는데, 공기압축기에서 착암기로 압력이 전달되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었다. 구멍은 지름 약 25mm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구멍이다. 
  구멍에는 뇌관과 화약, 도화선을 설치하는데 특별 교육을 받고 단계별로 천천히 진행됐기 때문에 폭발로 인한 사상 사고는 거의 없었다. 암석의 강도에 따라 화약을 두 개, 세 개, 다섯 개 등 사용했다. 
  화약 다섯 개가 사용될 때는 첫 번째 것부터 순서대로 터지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데 도화선에 불이 잘 안 붙는 경우에는 도화선에 불을 다 못 붙여도 작업장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수작업으로 돌을 뚫는 것을 '맹이질'이라고 하는데 착암기와 맹이질은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맹이질은 노미라고 불리는 약 70cm 길이의 쇠말뚝을 만들어 쇠망치로 돌을 뚫는 방법이다. 쇠말뚝으로 노미를 두드려 깨진 돌을 긁어내고 다시 두드리며 구멍을 뚫었다. 맹이질은 약 50~60cm, 착암기는 약 150cm 길이의 구멍을 냈다. 노미는 대장간에서 만들었고 일부 주민들은 손수 만들어 쓰기도 했다.
  등산로가 아닌 길로 천태산을 오르면 수많은 갱도 입구와 산이 꺼져 내려앉은 동공과 막사를 볼 수 있다. 이 흔적들은 예산 탄광사업이 철수되는 1995년 예산 탄광 합리화 사업을 통해 갱도를 메꾸는 과정을 거친 후 예전의 모습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그런데 합리화 사업이 적용되지 않은 지점에 남아있는 수평갱도와 화약창고, 건물형 막사는 아직도 당시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어 무연탄을 캐서 운반하던 장비가 녹슨 채로 남아있기도 하다. 
  당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무연탄은 바닥에 버리고 상급 무연탄을 트럭에 실어 날랐는데 무연탄을 버렸던 곳은 지금까지도 풀이 나지 않아 당시 트럭이 다니던 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천태산의 무연탄은 고품질이었는데 채탄량은 연간 1만 2천 톤으로 많이 생산될 때는 3~5만 톤이었다. 이는 대형 광산에 비하여 영세한 규모로 전용갑 씨가 운영했던 홍성 중앙연탄공장과 전용갑 씨 아들 전영수 씨가 운영했던 예산 삼광연탄에 원료를 공급하기에 약간 부족한 양이었다.
  천태2리 토박이로 1956년생인 권환동 씨에 따르면 “산이 비었슈. 여기 천태 사거리 다 팠슈. 사방에서 뺑 돌아서. 김기태 씨네 거기 광산 사무실이었슈. 산 올라가면 탄 캤던 데라 갈라진 데가 있고 이만한 구멍에서 겨울에 김이 나. 광산 개발한 데 보면 바람이 막 나오잖아. 그런 식이지.”라고 말한다.
  1940년 청양군 비봉면 녹평리에서 태어난 천태2리 김기태 노인회장 사유지에는 합리화 사업 당시 사용하던 사무실이 남아있다. 
  현재 창고로 쓰이는 사무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전화기, 달력, 현판 등이 남아있었다. 채광기능사로 일했던 이만규 씨는 옛 사무소 옆집에 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여기가 그전에는 조그만 흙집으로 지은 사무실이었어. 90년대 대천에서 중고 자재 가져다가 지은 거야. 여긴 사무원들이라고 하지. 서기원이 있었고 기술자, 광산기술자가 있었어. 이 방은 대표실. 여기는 분석실, 여긴 자재실. 분석은 석탄 분석하는 거지 석탄 열량 분석. 저 달력은 97년도 달력인디 서류상 95년도 그 해가 마지막 해야. 정부 정책에 의해 탄광 운영이 끝난 게. 한계사업이라고 안 맞는다는 거지. 말하자면 가스가 들어오고 석유가 들어오니까 탄광이 한계사업이라고. 인건비도 올랐는데 탄값은 싸고, 아무리 생산을 해봐도 임금도 안 나온다고 해서 한계사업이라는 거야. 공식 문서상 95년이고 업무는 그 이후까지 봤지.”
  ​“그 전에 막 100m, 200m 시추를 했거든. 그걸 내가 감독도 하고 구경도 하고 그랬지. 보면 이렇게 코어가 찍혀서 나와. 동그랗게 돌이 요만한 코어가 있어. 시추를 하면 암반이 경사가 졌다든지, 수평이 됐다든지 이래가지고 탄이 몇 m가 있고 돌이 얼마가 있다 이런 식으로 측정이 되는 거야. 옛날에 석탄광에서 코어라고 하면 다 알아들었지. 지질도 검사할 수 있고 그 부근에 석탄도 다 확인할 수 있고 그런 거야. 그걸 시추탐색이라고 허고.”
  ​예산 탄광은 일제 강점기 탄을 캐기 시작했다. 탄광을 처음으로 운영했던 고인문 씨는 1950년대까지 운영하였다. 1960년대는 전용갑 씨가 운영하며 탄광에서 많은 수익을 얻고, 1987년경 김영각 씨가 인수할 당시 휴광 상태였다. 김영각 씨가 인수 후 약 2~3년을 운영하다가 마지막으로 구창회 씨가 인수하여 예산탄광 합리화 사업을 시행하였다. 주민들과 80여 년을 함께 했던 천태영업소는 1995년 공식적인 막을 내렸다.​

합리화 사업에서 메워지지 않은 수평갱도의 모습.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많이 메워진 상태라고 한다.
합리화 사업에서 메워지지 않은 수평갱도의 모습.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많이 메워진 상태라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