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면 석산마을
홍동면 석산마을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11.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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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가져다준 석산의 이야기
석산마을이라는 글자 밑에 돌팡뫼라 새겨진 이름을 통해 마을에 돌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석산마을에는 돌팡뫼라는 이름 유래처럼 마을 안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바위들이 있습니다. 만경산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있는 바위마다 석산 주민들과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석산마을 주민들이 들려주는 바위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팔괘리 여기 돌팍미. 돌 석(石), 뫼 산(山). 한문으로 석산(石山)이지. 우리나라 말로는 돌. 돌산이다 이런 뜻이야. 돌팍뫼. 뫼가 미로 돌팍미가 이거 되지 않았냐. 우리말 다루기여. 원래 뫼여.”- 이우영(83세, 남)
  “돌이 많은디. 뫼 산(山) 쓰는데 근디 이 아래는 돌이 없고, 요집 위로 저쪽으로 지금도 밭 같은데 자갈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여. 그래서 돌팡뫼라는 지명이 이 돌때매 생겼나 저 돌때매 생겼나 그건 몰라요.”- 정항모(81세, 남)
  석산마을에는 매작바위, 두엄바위, 구암, 넓적바위 등 여러 크기와 바위가 마을의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마을의 바위를 찾아 떠난 길, 중뜸에서 만난 박한일 님(94)과 함께 두엄바위를 찾아 떠나보았다. 큰집 뜰에 마실 다녀온 박한일 님은 두엄바위의 위치를 묻는 조사단의 물음에 선뜻 조사단의 손을 잡고 두엄바위를 찾아 앞장섰다. 두엄바위로 가는 길이 많이 바뀌어서 찾아가기 어렵다는 어르신은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떼면서 시어머니에게 들은 만경산과 막내딸 간호사 시험 볼 때 두엄바위에서 기도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저게 아주 유명한 (만경산)산이야 당산. 시어머니가 일러주었어. 왜 당산인지는 기억이 안 나. 그리고 우리 막내딸 간호사 시험 볼 때 저기서(두엄바위) 기도하기도 했어. 두엄바위 엄청 유명해. 땅들은 다 파내는데, 저건 커서 못해.”
만경산은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큰 바위들이 많이 있는 산이다. 진두고개를 넘어가서 뒷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두엄바위는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묵묵히 자리 잡고 있다. 두엄바위는 바위만큼 많은 *두엄을 준비해야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외에도 두엄바위 주변에는 나무가 우거져 그 나무를 베어서 바위가 보이면, 여자들이 바람난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두엄은 가축의 배설물, 축사에 까는 짚 등의 재료를 퇴적 발효시켜 만든 유기질 비료이다.
  “나 한길(내 키) 반쯤 되는 바위가 있고 또 이 고개 넘어서래미 저 산 올라가는 다른 산 올라가는 길로 가면 두엄 바위라고 또 큰 바위가 하나 있어요.”- 정항모(81세, 남)
  “상팔부락 넘어가는 고개 딱 넘어가면서 아까 얘기한 ​(이동의 님)집께서 만경산을 보고서 한 50m쯤 가면은 이 하우스 반쪽만 한 바위가 있어. 멀리서 보면은 농민이 논에다 두엄을 쌓아놓은 거 같애. 두엄누리. 퇴비. 그래서 두엄바위야.”- 이해헌(67세, 남)
중뜸에서 바라본 만경산은 낮지만 우직함이 담겨 있는 산이다. 석산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만경산에는 주민들이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만경산 매작바위 이야기를 이해헌 님(67)이 들려주었다. 매작바위는 어린아이가 손을 대고 흔들어도 움직인다는 바위이다. 매작바위 아래에는 백제 때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석판을 이용한 옛 고분도 많았기 때문에 석재를 팔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매작바위는 뭐라 하냐면 맷돌을 충청도 방언으로 매작이라고 혀. 맷돌을. 왜 그랬느냐. 흔들바위라고 해. 흔들바위가 위에 큰 돌 있고, 아래에 작은 바위가 있잖여. 가는 매와 비슷한 거여. 그지? 위 작은 돌. 여기에 그 매작바위라는 게 위가 커. 이거 합친 거 네 배쯤은 돼. 밑은 요매난 돌로 사방. 쐐기처럼 놨더라고. 그럼 안 흔들리지. 빼면 흔들흔들해. 초등학생이 흔들어도 흔들흔들해. 흔들흔들하면 2, 3톤 될라나. 요매난 돌로 많이 꾸워놔서 쐐기를 해놔서 안 흔들려.”
  “여기 돌에 있는 금석문을 내가 다 다니며 (석문을)사진 찍고 내고 그랬는데, 새겨진 글귀가 많이 있어요. 매작바위 앞에도 있고. 매작바위 앞에는 글이 세 개 있는디 그 말고 여러 자 새긴 글이 있다고 으른들이 하는디 그 등 너머에 내가 찾아보지 못했어. 흙 속에 들어갔나. 네 자식 두 개. 승정이월제일임천이라는 글도 있고.”
  매작바위를 만나러 가는 길에 펼쳐진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작바위를 가는 길은 나무가 우거져 지금은 멀리서만 볼 수 있었다.
  석산마을 청년들이 밤이 되면 모여서 놀았던 청령굴에는 대나무밭이 우거지고 큰 바위가 있었다. 현재는 대나무밭은 사라지고 논밭으로 경작되면서 인삼밭이 되었다. 청령굴 중심에 서서 마을을 둘러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해서 청령굴을 마을의 중심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의 중심이 되던 청령굴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청령바위에서 밤이 되면 석산마을 청년들이 모두 모여서 풍장을 치고 놀았다는 기억을 들려주는 정항모, 이동희 님. 두 분은 20대 초반, 젊은 시절 그곳에서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저기 들어가면 바위가 있었거든요. 그러면 저녁때 거기 되면 사람들이 뫼가지고서(모여서) 거기서 풍장치고, 놀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시대가 변천하면서 사람들이 없잖아. 이제 그래서 저렇게 묶었어.”- 정항모(81세, 남)
  ”거기 조그마할 때 갔지.”- 백용기 (56세, 남)
  옛 청령굴 자리가 지금은 인삼밭이 되었네요?
  “20대 때. 군대 가기 전에 그랬었으요.”- 정항모(81세, 남)
  “옛날께 남아 있겠어? 10년이면 옛날 강산도 변한다 그러지. 지금 1년 반이면 완전히 강산이 변해.”- 백용기 (56세, 남)
  “지금은 인저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해서 풍장 치는 것도 거의 없어지고 풍물이랑 용대기 같은 것도 있었는데 언제 없어졌나 다 없어지고 그랬어요.”- 정항모(81세, 남)
  마을의 중심으로 모두가 즐겁게 지내던 곳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전히 석산마을 어르신들 기억 속에는 추억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오늘도 마을의 산과 바위는 변함없이 한자리에서 우직하게 석산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대나무 밭이 우거졌던 청령굴의 옛 모습이다. 현재는 대나무 밭이 사라지고 인삼밭이 되어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대나무 밭이 우거졌던 청령굴의 옛 모습이다. 현재는 대나무 밭이 사라지고 인삼밭이 되어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블로그|작성자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김새롬,전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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