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홍동면 석산마을
[홍성군 마을 이야기] 홍동면 석산마을
  • 투데이충남
  • 승인 2021.11.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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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석함, 만경산
미라와 잠들어 있는 곳
미라와 잠들어 있는 곳

  붉게 물든 진달래와 연분홍의 벚꽃, 샛노란 개나리가 만경산의 봄을 출렁이게 하고 있다. 만경산은 석산마을 뒤에 있는 수호신 같은 산으로 석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을 ‘당산(堂山)’으로 부른다. 만경산은 석산마을 외에도 팔괘리 송정마을, 상팔마을과 홍동면 신기리 민경마을, 반교마을, 홍성읍 구룡리 동구마을 등 여섯 개의 마을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만경산에는 두엄바위, 매짝바위, 병풍바위 등의 다양한 바위와 돌이 많고, 꼭대기에 산불감시 안테나가 설치되어있다.
  다양한 이름의 만경산
  “인저 군에서는 만경산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동네에는 만경산을 집 당堂자, 뫼 산山자를 써서 당산이라고 불러. 당산. 왜 그러느냐. 항상 소유가 이 동네였어. 또 당산 꼭대기에는 당집이 있었어요. 산신당, 산신각이라고. 그래서 당산이라고 불러. 그거를 한 1920년경인가? 오래 묵고하면 벽을 다시 바르고 하잖아. 정월대보름 무렵에 임낙원이라는 분이 도배를 하겠다고 도배풀을 쑤다가 잘못해서 불이 났었지. 지금도 파면 검정 숯 같은 일부도 나올 거야.” - 이해헌(67세, 남)
  “저 뭐야 저들한테 통신기 안테나선 있지? 있잖아. 그 밑이 당산이야. 원 지명은 만경산이라고 하는데 이 동네에서는 당산이라고 하거든요. 왜 당산이냐고 하냐면은요. 네모지게 아래가 판판하게 됐어요. 그 위에 당집이라고 그 제사를 지내는 집 있었대요. 나도 그건 구경 못했는데 당집이 있고 거기서 쭉 내려오면 옹달샘이 하나 있었어요. 그 옹달샘도 없어졌지, 이제 뭐. 물을 길어다 먹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어떻게 하다가 사라졌는지 손실되고, 그 이후로는 어른들 안 계시고 하니까 그 당집이 이제 없어지고서 말았지.” - 장항모(81세, 남)
  “옛날에 어른들이 거기 빌은빈 자리가 거기 당집이라고 그랬지. 당산 위에 있었다 그거야. 산제당, 산제당이라고. 나도 보든 못했는데 으른들한테 들은 걸로는 그렇게 들었어.” - 이동의(75세, 남)
  고려장터와 미라
  만경산에는 각종 도자기, 사기그릇 등 유물들이 쉽게 발견됐다. 마을 주민들은 만경산에 미라와 고인돌이 존재하며, 옛날부터 고려장이라고 부르던 무덤이 많아 만경산이 고려장터고려시대의 무덤라고 말한다. 현재 미라의 부패를 막기 위해 미라의 무덤 입구에 문을 설치해놨으며, 열쇠로 단단히 잠가놓아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고려장 덮개 석으로 사용된 들돌은 집을 지을 때 구들장으로 사용했다. 고려장 안에 있던 부장품들은 마을 아이들이 꺼내서 가지고 놀기도 하고, 일부 마을 주민이 장식품으로 가져갔지만 대부분은 도굴되거나 파손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만경산에 대나무밭 속에 있지? 우리 어렸을 적만 해도 놀대가 없으니까 만경산에 올라가서 놀으면은 퉁퉁 퉁퉁 소리가 났는데 전부 그게 고려장이야. 만경산에 고려장이 산재했었어. 구들장은 그전에 돌로 놨잖아? 방둑방바닥이 구들장이야. 근디 이 위에 사는 이재형 씨라고 그분이 살림이 조금 어려웠는데 석공 일을 해서 구들장으로 방독방바닥을 떠서 그걸 다 팔았대. 아직도 고려장이 몇 개가 남아있는 거 같아. 대나무 바로 위에 있는 곳이 내가 알기론 여러 가지 토분 이런 게 많이 나왔어. 나왔는디 옛날 사람들이 그게 문화재인지 뭔지 아나? 엿장수한테 엿 뭐 두 개, 한가락 주면 그걸 바꿔 먹고 그랬어. 거기서 남는 것은 조양 문화재 연구원인가 문당리 농업 박물관에 갖다 줬어. 만경산은 문화재 많이 있었고, 미라가 있어. 지금은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봤어. 완전 반듯이 누워 있는데 베로 쌓은 것이 그대로 있었거든. 근데 그게 풍화작용 있었어가지고서 구멍이 뚫렸더라고. 동물이 와서 건드렸겠지.” -이동의(69세, 남)
  “고려장터 여기. 첨에는 군에서 관리했나 면에서 관리했나? 그 문에다가 뭐 한 거였는데 지금은 관리를 안 하더라고요. 한 2~30년 전 팻말 쓰고 관리했는데 지금은 관리 안 해요.” -정항모(72세, 남)
  “고려장터가 지금 여기 두 개가 있는데 시신이 있었어. 그걸 인제 문화재관리청에서 그걸 발굴하려고 문 이렇게 달아놨는데 그게 인저 문을 열고 닫고 하니께 지금은 삭아서 없어졌을 거야. 그걸 했던 흙토자기 같은 건 그것도 몇 해 전인가 나왔어. 그걸 백제시대 거라고 하는 건데 추측이 그래. 백제시대.” -이용세(80세, 남)
  “신평이가 종산인데 처음 산소를 만들었는데 미라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거를 보존해달라고 여러 곳에 요청을 했어요. 그게 아직까지 추진이 안 되었더라고요. 미라라는 게 우선 공기하고 접촉하면 망가진대요. 그래서 지금은 토굴로 해서 유리문을 작게 달아서 보이게는 해놨는데 보이지는 않아요.” -장숙영(47세, 여)
  봉화대와 토성, 그리고 3ㆍ1운동
  만경산은 산 자체가 크지도 높지도 않지만 주변 방해물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있다. 만경산 정상에는 화산 분화구처럼 배구장 2배 정도 크기의 인공 봉화대가 있어 전망이 매우 좋고 평평하며, 토성이 둘러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홍동면의 애국지사가 만경산 꼭대기에 올라와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북한군 연대본부이자 군사 요충지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시대에 누가 새긴 글귀가 몇 자 있어요. 내가 그래서 사진도 찍고 향토문화지도 낸 적이 있지. 단편으로 한 여덟 개 있어. 긴 글귀로 새긴 겨. 몇 자씩 안 돼. 꼭대기의 토성 안에도 글이 두 개 있는데 그건 연대나 사람까지라 별 의미가 없어. 산의 맨 꼭대기에 가면 사방 다 보여. 홍주목. 홍성 시내까냥. 그래서 늑 사四자, 바랄 망望해서 사망대四望臺라고 새겼고. 고 밑에는 바위가 쪼끄만 해. 작을 소자, 까마귀 오자해서 소오小烏라고 새겼지. 큰 바위 밑이 조그만 까마귀 같으다. 그냥 자기가 보고서 이름을 알아서 새긴 거니까 별 의미는 없어요. 그리고 만경산을 부흥운동할 때 중간 병참기지라고 주장을 하여. 구룡리 저 사성허고 저 지금 홍성시내 신토불이 음식점 뒤 고모랭이고모루성 하고 여기 당산하고가 병참기지여서 임존성서 싸울 때 병참기지의 트라이앵글이 돼. 양쪽서.”- 이해헌(67세, 남)
  “토성이 네모반듯하게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솟댓길로 올라가 소를 바쳐 놓고서 내가 공부한 곳이야, 거기가. 그게 뭔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 우리는 고증이 없으니깐. 그리고 또 봉화터가 있잖남. 퇴미산에서 봉화를 올리면 여기 만경산으로, 만경산에서 저 오서산으로 아마 릴레이식으로 봉화를 올렸을 거야. 그 가새가장자리가 수레를 올라갈 수 있는 나사모양으로 만들어져있고 그 밑에가 층으로 달팽이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그리고 산 뒤편에 청정지역 닭장이 있잖아? 청계닭. 그 근방이 옛날 6·25 때 인민군들 본부였어. 레이더가 안 잡히는 모양이여. 우리 어렸을 때 4~5살 정도, 지금 집짓기 전에 싸리문이랑 대나무로 된 울타리를 했었거든. 근데 여기 골고개로 인민군들 도망갈 때, 후퇴할 때 소리도 없이 쉭쉭쉭 갔어. 인민군들이 갈 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업고서 있었는데 울타리에서 쳐다본 기억이 나. 어머니한테 업혀서 인민군 도망가는 그 모습이. 쉭쉭쉭쉭. 그냥 떼지배로무리지어 가는 거야. 여기 본부가 있었으니까 통신대가 있고 진지고개가 무척 높았어. 지금은 흙을 무녀가지고서 이 고개가 간단해지고, 얕아졌는데 고개가.” - 이동의(69세, 남)
  “당산을 토속인의 토성지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면 네모지게 이렇게 길산하서서래미 여기다만큼 아래 가서 판판하게 이렇게 됐어요.” - 정항모(72세, 남)

만경산 바위에 적힌 글자들
만경산 바위에 적힌 글자들

[출처] 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블로그|작성자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김새롬,전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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