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화계1리
[홍성군 마을 이야기] 장곡면 화계1리
  • 임미성 기자
  • 승인 2021.10.27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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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역사가 녹아있는 마을

  100년 전 그날, 장곡기미 3·1운동
  일제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탄압으로 참혹했던 그때의 나날들.  그리고 그 만행에 맞서, 조국의 독립만을 바라며 앞장서 대응했던 그때의 목소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최초로 봉화 불을 켰다는 데가 저기 있어요, 마을에.”
  김태종(58세, 남)
  “응, 맞어. 매봉산, 매봉재.”
  이석환(86세, 남)
  1919년 4월 4일 홍성군 장곡면 신풍리 매봉산에서 윤익중, 현중, 낙중 삼 형제의 횃불시위. 그리고 7일 늦은 밤, 장곡면 주민들이 화계리, 광성리, 신풍리를 돌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할 사람들을 이끌어 낼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장곡면의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다. 
  장곡면민 500여 명은 장곡면의 소재지인 도산리에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화계리 주민들의 경우 장곡면사무소 뒤편에 위치한 응봉산(일명 매봉산)으로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동하는 '면사무소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괘씸한 일이기 때문에 면사무소를 부숴야 한다.'라며 주민들을 선동해 곧이어 주민들과 함께 돌을 던져 창문 유리를 깨뜨리는 등 문기둥과 집기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이들은 일본 경찰과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게 됐다.  그들은 일제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8일에 다시 시위군중 6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 윤씨네 있잖아요, 그런 거. 독립유공자들이 많은 마을이에요.”
  김문식(67세, 남)
  “독립만세 유공자 대표여. 화계리는 윤낙중씨도 운동을 많이 했지만은, 독립만세 사건은 이 동네에서 경주김씨가 주축이 되는거야. 3·1운동 때 최고 많이 참여한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어. 경주 김씨들이여.”
  김주복(75세, 남)
  장곡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윤씨 삼 형제의 부친은 윤태병으로, 슬하에 윤형중, 윤익중, 윤낙중을 두었다. 첫째 아들 윤형중은 장곡면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애족장에 추서된다. 둘째 아들 윤익중은 장곡면의 독립만세운동에는 직접 참여를 하지 않았으나 1919년부터 1920년대까지 활발한 독립운동을 한 장곡면 지역의 독립운동가다. 셋째 아들 윤낙중의 호적 이름은 윤기순이며, 그는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형과 뜻을 같이하기 위하여 고향인 장곡면에 내려와 인근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되어 그는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1921년 5월에 1년을 복역하고 출옥한 후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문물을 습득한 후 귀국하게 되고, 1983년 8월에 애족장을 받게 된다. 
  윤씨 형제와 같은 장곡면 화계리 독립유공자로는 윤의석, 김용제, 한상철, 이화춘, 김동완, 이문재, 윤만수, 최기석, 최채선, 이성근, 이철림, 김차제, 김동운, 윤기섭 등이 있다. 
  장곡초등학교의 전신, 화명학교
  “화명학교가 아주 초창기 여기 있다가 장곡학교로 갔다메요.”
  김태종(58세, 남)
  “화명학교 2대 졸업생이 장곡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랑 똑같어. 여기서 제일 먼저 학교가 생기고 거기가 장곡초등학교가 됐지.”
  김주복(75세, 남)
  신풍리 소라실골에서 화계리로 넘어오는 고개 아래에는 '황참판 댁'이라 불리는 큰 기와집 2채가 있었는데, 그 집 앞에는 아름드리 향나무 2그루가 서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연못이 있는 전형적인 고택이었다고 한다. 황씨 집안은 예로부터 장곡면의 유력가로 명성이 높았던 가문이었을 뿐 아니라 화계리와 그 주변의 넓은 들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재력 가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 중에 못된 짓을 하거나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황참판 댁에서 불러다 향나무에 매달고 곤장을 쳤을 정도였다고 하니, 황참판 댁은 화계리에서는 명망 높은 가문이었을 거라고. 이러한 주민들의 이야기들은 조선시대에 지방의 재지사족이 지방지배의 일환으로 향약, 향규를 시행하며 선악을 구분해 지역민을 징계하는 방식 중 하나였던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 아들이 황참판 벼슬이지. 그렇게 귀해서 옛날에 향나무도 있었는데, 거기다 잘못한 사람 있으며 기다라놓고 (매달아놓고) 했다고. 향나무 그게. 그것도 다 팔아먹었네, 
  얼마에 팔았나.”
  이석환(86세, 남)
  “향나무 2개가 있었는데 거기서 인제 말 안 듣고 그러면 거기서 사람도 막 사형도 시키고
  그랬다고 그러데. 그래갖고 거기가... 그 나무는 제사 못 지낸다고.”
  김태종(58세, 남)
  이렇듯 화계리 일대의 질서를 다스렸던 황씨 집안에서는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해당하는 시기 동안 주민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집의 일부를 내놓고 이곳에서 근대교육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곳을 ‘화명학교’ 라 이름 짓고, 장곡면의 근대교육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여기 ○○네 기와 창고. 안 뜯었어야 해. 그거 안 뜯었어야 하는데.”
  이석환(86세, 남)
  하지만 그때의 기와집은 2006년에 모두 헐어버렸고, 그 가문의 후손도 마을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공동 농기계 보관창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로 화명학교를 기억하고 있다. 

기와집을 완전히 헐어버리기 전의 모습(사진출처: 장곡향토문화유물전시관)
기와집을 완전히 헐어버리기 전의 모습(사진출처: 장곡향토문화유물전시관)

 [출처] 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블로그|작성자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이은정, 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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