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높은 문화국가 고려를 만든 공주역사속 큰 인물 정진국사의 외침
[기획]높은 문화국가 고려를 만든 공주역사속 큰 인물 정진국사의 외침
  • 석용현 기자
  • 승인 2021.08.09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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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충남/ 석용현 논설위원]한국의 역사에서 문화가 높은 시대를 찾아본다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수월관음도(조사자료에 의하면, 세계에 170여점이 있는데 일본에 120점, 한국에 20점, 기타 30점이 남아 있다함)와 고려청자 도자문화를 가진 고려시대가 아니었을까, 이 높은 문화를 만든 고려의 위대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본 논설위원은 충청남도 공주 월성산 남혈원(현재는 남혈사지) 출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남악계(南岳系)를 대표하는 대선사(大禪師) 정진국사 (성은 왕씨 이름은 긍양)이 아닐까 진단한다.

긍양은 속성이 왕(王) 씨로서 지금의 공주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글공부보다는 시와 글씨, 그림 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5세에 이르러 부모에게 출가의 뜻을 밝힌 그는 공주 남혈원(南穴院) 여해선사(如解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스무 살에 계룡산 보원사(普願寺)에서 계를 받았고 서혈원(西穴院)에 머물고 있던 양부에게 나아가 법을 받게 된다.

양부는 도헌의 법을 이은 수제자이다. 23세가 되던 해에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고 마침내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을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924년 정진국사 긍양이 귀국한 때는 왕건과 견훤 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후삼국 말기에 해당한다. 

그는 어지러운 세속을 떠나 조용한 산속에 은거하다 스승인 양부가 머물렀던 강주(康州) 백암사(伯巖寺)에 주석하게 된다. 그가 백암사에 머물자 배움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며, 그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어 신라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 귀의의 뜻을 전했으며,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별호까지 내렸다.

정진국사는 899년(효공왕 3) 당나라에 건너가 곡산도연(谷山道緣)에게 석상(石霜)의 종지(宗旨:으뜸가는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곡산의 대답에 크게 깨달았다. 

정진국사는 924년(태조 7)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의 백암사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으며, 경애왕은 그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내려주었고, 935년(경순왕 9) 희양산(曦陽山)봉암사(鳳巖寺)를 중창하고, 양부의 뒤를 이어 그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고려 태조는 물론 혜종, 정종, 광종 또한 긍양을 스승의 예로서 대하였다. 특히 광종은 그를 ‘희양산의 화신보살’로 추앙했으며, 긍양이 79세로 입적한 후에는 정진대사(靜眞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 했다
  그는 중국 청원계(靑原系)의 선교일미사상(禪敎一味思想)을 계승하여 단순히 선만을 지향하지 않고 ‘능가경 楞伽經’·‘화엄경’을 열람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선교관은 “색과 공은 다르지 않고, 말과 침묵은 같은 것이다(色空無異 語默猶同)”라는 그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하여 정종이 새로 찍은 ‘화엄경’ 8질을 그에게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융합적 이해의 태도는 기존의 교학을 버리지 않는 선, 민간신앙까지도 포섭하는 융선적(融禪的)인 남악계의 전통을 보여주며, 특히 선의 고유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순선적(純禪的)인 북산계(北山系)와는 달리 신라적인 선풍을 유지하며 수선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법맥은 혜능(惠能)-남악(南嶽)-마조(馬祖)-창주(滄洲)-정현(鼎賢)-도헌(道憲)-양부-긍양으로 이어진다. 사리탑과 비문은 보물 제171호와 보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문경 봉암사에 봉안되어 있다.

시호는 정진국사(靜眞國師), 탑명은 원오(圓悟)이다.

정진국사 긍양(화신보살)은 왜 봉암사를 ‘강남스타일 (빠름을 강조하는 남종선)’로 바꿨을까, 오늘의 세계적인 BTS 스타일의 불씨는 정진국사로부터 불씨가 피어오른 것이다.  몇 해 전 가수 싸이는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를 들고 나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고 이 곡이 발표되자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 곡을 패러디한 여러 노래들이 등장하여 강북 스타일을 비롯해서 부산 스타일, 광주 스타일, 뉴욕 스타일 등 각 지역의 특성을 담은 노래와 영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홍대 스타일과 같이 자신들이 다니는 대학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들도 유행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스타일이 다양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

싸이는 강남 스타일, 길도 없는 공주 남혈사는?

불교 내에도 간화선 스타일을 비롯하여 위빠사나 스타일, 간경 스타일, 염불 스타일, 다라니 스타일 등 여러 수행 스타일이 있으며, 불교의 수행도 사람들의 다양한 기호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대, 여러 수행들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서 신행의 기초로 삼으면 될 일이다. 특히 선불교에는 강북을 대표하는 북종선 스타일과 강남을 대표하는 남종선 스타일이 있다. 정진국사 긍양에 이르러 희양산문은 빠름을 강조하는 강남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법맥마저 강남 스타일로 바꾸었다. 

정진국사의 고향 땅, 남혈사는 지금 어떤 모습의 스타일일까?

조선의 충청관찰사 유근의 시문을 모아서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쓴 서경집이 나온 때는 1662년으로 충청관찰사 오정위에 의해 시집이 개판되고, 다시 삼척부사 김진표에 의해 1665년에 문집이 보완되어 개판되는데, 그 서경집을 처음 개판한 장소가 어딘가 하는 것이 바로 1662년 공산의 남쪽에 있는 남혈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삼국유사에도 공산의 남쪽 남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산의 남산이라면 지금의 생태공원, 금학동 휴양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10년간 3분의 시장이 약 450억원의 나랏돈 에산이 들어가는 사업(공주시 자료제공)에 크게 변하고 있지만, 성과는 형편없고 비전도 없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주변 관광지(남혈사)와의 연계가 없다는 점에서 한심한 지역개발정책이다.

조선시대에도 남혈사는 1660년경에 스님들이 모여 살면서 수행을 하는 동시에 문집을 간행할만한 여건을 갖춘 사찰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나무에 판각을 할 글씨는 문중에서 썼거나 아니면 스님들이 썼을 수도 있으나 그 글을 나무에 새겨서 다시 인출하는 과정을 살펴본다면 이는 분명 남혈사에 목재와 먹의 성질에 정통한 스님이나 글을 새기는데 능통한 각수 역할의 스님들이 있었다 보여진다. 혹시 더하여 종이를 생산하는 역할도 있었을지 모른다.(원효사 고 해월스님 추론)

그리고 2015년 백제문화제 때 한일백제불교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현 마곡사주지 원경스님이 무궁화 한그루를 심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 지금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정리하면 고려초 정진국사는 5임금의 스승인 왕사로서 위대한 고려불교문화의 국가스타일을 창의적으로 설계한 공주 남혈사 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이곳 남혈사는 조선 1662년대에 충청관찰사 오정위가 충청관찰사 유근의 시집, 서경집을 목판 서각작업화를 추진할만큼 활발하게 쓰임이 있던 명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남 유형문화재 제35호인 남혈사지로 가는 정상적인 길이 없다. 한국의 역사속에서 가장 위대한 높은 문화국가를 설계한 고려초 정진국사의 출생 수행터로 가는 길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아 하는가...

현재 공주시는 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행정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문화도시로의 꿈, 그 이전에 무엇이 중요한지, 실행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하는 정책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현 공주시장(김정섭)이 좋아한다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고 하는 시상이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공주시에 큰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이제 문화도시를 꿈꾸는 공주시(김정섭 시장)에 기대 해보는 10만 5천 공주시민과 공주관광 방문객들에게 위대한 인물 정진국사의 가르침을 향한 남혈사로 가는 역사의 길과 봉화대로의 탐방로 길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미래세대 문화공주를 위해 길을 열으라는 정진국사의 외침이 흐른다.

이제 문화수도라는 공주시의 행정역량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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