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40회/ 6장 미망의 시간 (5)
[연재소설 19로탄] 40회/ 6장 미망의 시간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6.0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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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대전을 돌아온 김산은 메일을 확인한다. 두 통의 메일이 들어와 있다. 한통은 강의를 듣는 학생이었다. 김산은 그 메일부터 확인한다. 내용은 박제가가 쓴 '북학의'가 그렇게 훌륭한 책이냐는 것이었다. 생뚱맞은 질문이다. 북학의는 박제가가 29살 때 쓴 것으로 49세되던 해 겨우 정조에게 보여진 책이다. 1797년 정조는 전국의 유생들에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궁리해서 올리라는 명을 내리는데 박제가는 이 기회를 이용, 자신의 역작인 북학의를 올렸다. 당시 충청도 면천군수로 나가 있던 박지원은 '과농소초'라는 농정개혁 방안을 올리게 되는데 그 내용을 필자가 한 신문에 발표했던 자료로 확인해 보자.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61세되던 1897년 6월 정조와 대면한다. 면천군수로 떠나는 박지원의 하직(下直) 인사자리였다. 조선의 외관직은 발령 즉시 군왕을 만나 인사를 하고 근무지로 떠난다. 군왕은 이 자리에서 수령칠사(七事)를 묻는다. 지방수령이 현지에 내려가 해야할 일을 말해보란 것이다.

수령은 농업을 증진하고 호구를 늘리며 향교를 부흥시키고 균역과 쟁송을 잘 관리하겠다는 지방수령의 임무를 말하고 군왕 앞을 물러난다. 이것이 '하직' 인사다. 박지원을 대면한 정조는 수령칠사를 묻지 않고 '이방익'에 대한 글을 쓰라는 임무를 준다. 이방익은 남해에서 표류하여 대만을 거쳐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그의 긴 여정을 책으로 써내란 지시였다.

박지원은 10년 남짓 관원생활을 했다. 그중 '안위'현감과 '면천'군수 자리가 그나마 안정된 자리였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이전에 이미 당대의 문인이었다. 그의 출중한 문장은 이덕무 박제가 등 시대의 문장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문장을 문제 삼아 여러번 수모(?)를 주며 그를 시험한다. 박지원의 문체가 순정한 고문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재주를 아낀 면도 있어 몇번 기회를 준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내려와 '면양잡록'이란 책을 쓰게한 것도 그런 경우다. 면양잡록에 수록된 '칠사고(七事考)'는 불과 지난주에 세상에 공개되었다(다음날 관련학회에서 발표될 예정). 책의 제목과 성격 그리고 간략한 내용이 소개된 정도다.

박지원이 면천군수시절 지은 면양잡록

칠사고는 지방수령이 해야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으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보인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재임시 '과농소초'라는 책을 써 농업의 진작과 수확량 증대를 꾀한 바 있었다. 칠사고에는 이 대목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벽돌의 제조나 수레와 수차의 개발과 활용 등으로 지역 산업을 진작해야한다는 수령의 임무 등을 밝힌 내용은 일반적인 수령칠사의 내용을 능가하는 실용적인 것이다.

박지원은 준비된 관원이었다. 군왕 앞에서 수령칠사를 읊조리는 관원이 아니라 수령칠사의 '교범'을 만들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박지원은 정조가 묻는 수령의 할일에 '칠사고'라는 책을 만들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박지원은 부자들의 토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자(限民各田議)는 개혁적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박지원은 농정과 천주교인의 단속 등의 문제로 당시 관찰사였던 한용화(1732-1799)와 갈등을 한다. 박지원은 관찰사와 관찰사의 막하(幕下, 참모)들과도 뜨겁게 맞선다. 다소 급진적이던 농정처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 등이 관찰사와 시비거리였고 박지원은 여러차례 사직원을 제출하기도 한다. 박지원은 공주판관 김기응(1744-1808)에게 사직의 변을 서찰로 남기기도 한다.

[이곳은 바닷가의 작은 고을로 외지고 일도 간단하여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 때까지 그다지 바쁘지 않습니다. 차차 몇권의 기이한 글을 엮어 책을 만들까 합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겨 다시 이 책상자를 끌고 돌아가야할 모양이니 이러다가 좀이 슬고 쥐가 똥을 싸놓아 작파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슬플 뿐이지 다른것이야 뭐가 있겠는지요.]

박지원은 언제나 사직을 결심하면서 직무에 충실하다. 면천에서 책 몇권 집필하는 것이 낙이라고 하면서 여차하면 그 낙마저 포기(?)하겠다는 결심이 서찰에 보인다. 공직자의 공과 사는 이런 자세에서 나온다. 관찰사 한용화는 사직원을 거듭 반려하며 고까운 심정을 '수령고과'로 반영한다.

[다스림은 구차하지 않으나 교묘하게 칭병이 잦다.]

박지원은 4년여간의 면천군수를 끝으로 8개월간 양양부사를 거치고 사직한다. 면천군수 재임기간에 박지원은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칠사고'는 그 중 한권이다. '칠사고'는 초서 원본 상태로 '국역'을 기다려야 한다. 십년내는 힘들(?) 것이다.]

박지원은 농지개혁에서 조선산업 경제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탁견을 내세운다. 그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박지원은 자신이 관장하는 면천군을 실증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과학적인 논리를 펼치며 정조를 설득한다. 같은 시기에 같은 내용의 논리를 펼친 박제가는 어땠나. 이곳에서 박지원과 박제가가 뚜렸하게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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