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39회/ 6장 미망의 시간 (4)
[연재소설 19로탄]39회/ 6장 미망의 시간 (4)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6.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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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은 영정조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였다는 역사학계의 중론에 일정부분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한 거부감도 함께 느껴왔다. 특히 정조를 개혁군주로 포장하기 바쁜 역사학계의 사업(?)에는 노골적인 반발을 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김산은 '역사는 자료로 말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정약용의 1810년 발언이다.

정약용은 논어에 새로운 주를 달면서 한중일의 논어 전문가들의 글을 두루 살피다가 일본 학자들의 학문 수준을 간파하고 이제껏 일본을 안하무인으로 무시만해 오던 조선의 태도를 비꼰다. 활력도 정당성도 없이 그저 기득권층의 보위사상으로 전락한 성리학을 붙잡고 맹목에 빠져 있던 조선의 당시에 비교하면 일본의 발전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 일본은 이미 조선을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문물의 발전이 조선을 한참 능가했다. 뒤처진 유일한 유학도 나름의 견해가 있다. (다산문집)


일본은 정조 당시 조선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본이 상대적으로 문물의 수입에 목을 매고 조선에 요청해 오던 조선통신사의 래일(來日) 행사를 거부(?)하기 시작한 시기가 정조시대다. 조선에 더이상 배울 것도 없고 경비만 발생하는 조선통신사 무용론이 일본에 생긴 것이다. 일본은 정 통신사를 보내고 싶다면 대마도까지만 보내라며 배짱을 부린 것도 이 시기다.

일본은 서양과 교역을 하는 데 성공을 한다. 일본이 청나라는 물론 마카오 홍콩 등을 중심으로 조차무역을 전개한 서세동점을 받아들여 내정을 정비하고 국가체계를 일신한 시기가 영정조 시대다. 정조시대에 와서 일본은 이미 조선의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나라의 면모를 일신하는 순간 정조는 어땠나?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들여온 천문이론인 지구는 둥글다는 말에 정조는 다음과 같이 대꾸를 한다.

- 지구가 둥글다면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은 낭떠러지로 떨어진단 말인가? 껄껄 웃을 일이다. (홍제전서)
정조는 성리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성리학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정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군사부일체를 실현시키겠다는 정치적 목표가 신념화된 사람이었다. 정조는 리(理)의 깃발을 들었다. 그 깃발 아래 조선의 삼라만상은 모여들어야 했다.
1. 세계는 요순의 시대가 좋다.

2. 세계는 리(理)의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

3. 그것을 이룰 사람은 나다. 나는 조선의 주인이며 만백성의 아버지고 사상의 적통자다. 나의 세도(世道)는 만대를 이어가야 한다.
문화를 좋아하고 사랑했던 정조가 많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여 조선의 어떤 군왕보다 문화를 촉발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조의 그 정책 하에서 조선의 유수한 문인들이 숨을 쉬고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과 책임이 있는 군주 정조는 세계의 발전과 문물의 촉진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 몰두한 측면이 있다. '장용영'의 설치나 '화성건설' 등 정조의 대대적인 사업은 '서세동점의 세계'라는 거대한 담론 안에서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업이었다.

김산은 정조의 양대사업에 끝없는 딴지를 걸어왔다. 장용영 설치와 화성건설이란 정조의 양대사업을 학술적으로 구현할 때만이 정조의 온전한 상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 김산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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