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 38회/ 6장 미망의 시간 (3)
[연재소설 19로탄] 38회/ 6장 미망의 시간 (3)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6.01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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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지방에는 기근이 들어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심히 많았다. 이에 불령한 무리들이 기회를 타서 갑자기 날뛰어 명리(命吏)를 죽이고 창고를 열어 도당(徒黨)을 불러모으자, 청천(淸川) 이북의 예닐곱 고을이 모두 적수(賊藪)에 떨어졌고, 부신(符信)을 나누어 가지고 인(印)을 찬 무리들은 겁을 집어먹고 지키지 못하여 혹은 도망하고 혹은 항복을 애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향(吏鄕)과 백성들은 천대받아 버려진 데 대해 원한을 쌓아왔고, 가렴주구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터라 한번 소리치매 메아리처럼 응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외로운 성에 겨우 숨만 쉬고 있게 된 이후에도 오히려 또 완강하게 버티며 미혹하게 변할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왕사(王師)를 폭로(暴露)시켜서야 겨우 이에 평정할 수 있었으니, 아! 개탄스런 일이다.

-조선실록

홍경래의 난은 정조 치세의 모순들이 모여 일어난 사건이다. 성군이 죽자 곧바로 탐관오리가 날뛰고 세도정치가 강성하며 잘 살던 백성들이 거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일어난 10년은 전임자의 책임이다. 정조를 거론하면 정조의 문치주의와 함께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화성의 건설이다. 화성(수원성)은 정조 18년(1794)에 시작하여 2년 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정조 20년(1796) 가을에 완성한 성이다.

정조는 이미 오래전에 이곳에 성을 쌓기로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 남쪽으로 옮기고 백여 번을 순행하며 화성 건설의 오기(?)를 부린다. 그리고 끝내 성을 완성한다. 정조는 이 성의 이름을 아예 화성(이전 수원)으로 하고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당시 재정으로 18만 냥을 들인 새로운 성과 도시를 만든 것이다.

의 수축을 놓고 후대의 학자들은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한다. 모두 입을 맞춘 듯하다. 자급자족 직할도시의 완성. 이용후생의 실학 도시의 구축. 화성은 성인(聖人)의 도시. 정조는 이 위대(?)한 일을 마치고 자축의 의미로 10일간 화성 행차에 나선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장대한 행차를 나선 정조의 10일 동안의 행차에 들어간 돈이 13만 냥이다.

학자들은 이 돈이 백성들에서 걷은 것이 아니라 여러 재정에서 조금씩 걷은 것이고 화성을 건축할 때는 근로자들의 노임을 모두 지불했다는 근거를 대며 화성 건설과 이 10일간의 행차를 칭찬 일색으로 치부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니다.

화성은 조선에 어떤 의미가 있나. 정조가 죽고 화성은 어찌 되었나. 화성이 단 한번도 군사적 기지 역할을 한 적이 있나. 화성에서 백성들이 모여 행복하게 살아던 적이 있나. 화성은 정조가 죽자 곧바로 수원부의 성으로 전락하여 폐허화 되었다. 조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화성 건설에 들어간 재정과 행차비에 탕진한 30만 냥은 순조 초기의 재정 압박으로 나타나 홍경래난과 같은 극단적 사건을 야기한다. 정조는 화성건설과 행차를 할 때는 거의 독불장군이었다. 그의 귀에는 아무 의견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조는 즉위 몇 년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문책을 물어 이미 피의 보복을 단행했었다. 그 숙청에 외할아버지도 사사된 바 있었다. 정후겸 홍계희 등 숱한 정적들이 귀양 또는 참수를 당한 것도 그 일환이다. 그리고 효도를 행한다는 이름 아래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완성을 본다.

그러나 화성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200년간을 버려졌다가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이것을 두고 정조의 선견지명이라 할 것인가.

정조의 시대는 성공의 시대가 아니라 실패의 시대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정조시대가 문예부흥이라고 하지만 정조가 키운 학자들의 꼴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정조는 학자들을 순치시킨 사람이다. 학자는 선비다. 조선의 선비는 도끼를 품고 왕에게 할 말을 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조가 키운 학자들은 모두 대가 허약하다. 순조시대 정조의 학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수만 명을 몰살시키는 정주의 대학살의 현장을 보고도 제대로 된 상소 한 장 올리지 못한 것이 정조가 키운 학자들이다.

정조는 문장의 구조 형식을 갖고도 신하들을 나무라며 훈계한 사람이다. 실용성과 효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에게 실용성을 강조하다 보니 겨우 눈치나 보는 관변 학자들을 만들게 되는 폐단을 낳는다. 심지어 정약용조차도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산수간에 묻혀 글이나 쓰던 것이 정조가 키운 학자들이다. 순조 초기의 조선의 실정을 보면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정조를 옹호할 수 없다. 정조는 '니들은 떠들어라 나는 고(GO)'다를 외치던 사람이다.

 


이것이 김산의 정조 인식이다. 그러나 김산은 이 인식을 수정하거나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조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 생각은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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