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9로탄]37회/ 6장 미망의 시간 (2)
[연재소설 19로탄]37회/ 6장 미망의 시간 (2)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5.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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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은 과사무실에 들러 다음 학기 강의 계획서를 제출하고 과의 조교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여러 통의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잘난 맛에 사시는 강사님, 대충 그 정도 하시지~. 역사학계에 댁보다 못한 학자 있나? 정조임금 그만 욕 보이셔.

이 정도는 오히려 약과였다. 육두문자에 그냥 두지 않겠다는 메일도 있었다. 한 잡지에 쓰고 있는 역사칼럼이 문제였다. 칼럼의 제목은 '정조를 생각한다'였다.

[정조는 대학자다. 그는 통치술보다 학문으로 신하들을 압도했다. 오랜 기간 좋은 선생들 밑에서 오직 학문에만 매달린 시간이 20년에 가깝다 보니 정조는 학문적으로 통달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 힘이 정조를 힘있는 군주로 만든다.

정조의 왕도는 왕이 신하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었다. 온전한 군사부일체의 실현이 왕조국가의 이상이라고 믿은 정조는 모든 신하들은 물론 조선의 모든 학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정조 앞에서는 당대의 어떤 학자도 맥을 추지 못했다. 심지어 정약용마저도 정조 앞에서는 설익은 미완일 뿐이었다. 실제로 정조의 학문적 실력이 그랬다.

정조가 죽기 1년전 당대의 학자 이서구와 정조의 독대에서 주고받은 문답으로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대의가 장차 어두워지고 오도(吾道)가 날로 외로워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시어 큰 교훈을 높이 내걸어 한세상의 준칙으로 삼으셨는데, 잘못된 시속을 괴로워하시는 뜻이 말씀 속에 넘쳐흘렀습니다. 이 교서를 받들어 읽고 나서도 깜짝 놀라 무서워하지 않고 이제 막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어리석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달갑게 여긴 자입니다.

그러나 풍속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그 또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밀고나가는 도를 견지한 뒤에야 비로소 차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한층 더 마음을 가다듬고 먼저 스스로 노력하시어 사물을 접하고 대처하는 모든 자세가 순수하게 오로지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마음에서 나와, 군자 소인의 성쇠 조짐을 잘 살피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공정한 마음을 분명히 내보임으로써, 우주를 지탱하는 이 의리가 중천의 태양처럼 빛나게 하여 지난날 정신이 혼미하여 헤매던 자들로 하여금 모두 이렇게 하면 충신 현사가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역적과 소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낡은 버릇을 통절하게 고쳐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하신다면, 만세토록 태평할 세상이 장차 이제부터 시작이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세상을 가르치는 교훈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일대 기회인 것입니다.

이에 감히 참람되고 버릇없음을 생각지 않고 충정을 피력하였으니,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오황극(五皇極)에서 말하기를 ‘법칙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악에 빠지지 않았다면 임금은 곧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였고, 채침(蔡沈)의 집전(集傳)에서 그 말을 풀이하기를 ‘받아들이면 함께 선을 행할 수 있고 버린다면 악으로 흐르는 것이니,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였는데, 근일에 하유한 말과 연석에서 한 분부는 대체로 그 말을 취택한 것으로서 일찍이 형벌을 가지고 신칙한 일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 경의 소장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겠다. 특별히 유념하고 처사에 반영하여 나의 공명정대한 길을 통해 다 함께 큰길로 나아가길 기대하고 싶다.
-조선실록

이서구는 간언을 통하여 정조말기에 이르러 조금씩 앙금이 끼고 있는 세자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준동을 경계하고 그 방지책을 만들자고 건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의 물리치는 방법이 노련하고 대단하다. 시경의 한 구절을 주청한 이서구에게 홍범을 통하여 별거 아니지만 그 건의의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는 것이다.

상사를 모시는 사람들이 가장 난감할 때가 이런 때이다. 다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마라. 이러는 상사에게 하급자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정조는 이런 식으로 신하들을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더 높은 이상을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의 이상은 큰 하자가 있었다. 조선 왕통에 자신 같은 천재적 왕재가 몇 명이나 되었다고 자신의 자식에게 그런 대업을 이어갈 수 있다 생각한 것일까. 정조는 어린시절을 외롭게 자랐다. 그리고 혹독한 사방의 견제세력의 감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영조는 공부를 좋아하는 세자를 위해 조선 제일의 학자들을 돌아가며 선생으로 초치, 세자의 실력을 높인다. 그리고 20대에 왕위에 오른다. 준비가 있었던 것이다. 정조가 꿈꾸는 왕조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50세 정도에 잘 키운 세자가 20대 후반쯤에 왕위를 물려받는 시스템이 되어야 하는데 세습 왕조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왕은 80을 살고 어떤 왕은 1년 만에 죽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삶속에 왕통이라는 대업을 담아내려던 정조의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정조 자신이 세자의 스승이자 장인으로 점찍은 김조순에 의해서 세도정치가 생겨나 조선을 파멸로 몰아간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정조시대 조선은 결단코 태평성대가 아니다. 정조시대에도 수없는 민란이 있었다. 정조가 죽고 불과 10년 후에 있었던 한민족 최고의 학살현장 사건인 정주 참살도 이미 이때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홍경래가 서북지방을 풍수쟁이로 위장하고 혁명의 동지들을 모을 때가 정조 말기다.

홍경래군을 토포한 순무영의 군장들 대분이 정조가 키운 장용영에서 나왔고 그들의 무자비한 토벌은 당시 서북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홍경래의 난은 정조가 죽고 11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한 진중일기가 전하는데 '관서평란록'이다. 안주목사 조종영이 쓴 것으로 홍경래의 키가 1미터 30을 겨우 넘을 정도에 불과하다는 기록까지 적을 정도로 정확하다.

순무군은 정주 박천 안주 등 홍경래난의 영향권에 있던 서북지역의 남자들 3분의 1을 죽인다. 순무군의 가는 길은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의 길이었다. 청야 작업이다.
조선군은 정조가 그토록 애를 써서 만든 군대 장용영의 후예다. 18만 무예를 연구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화기 무장 위력을 정비해준 성군 정조의 꿈이 서린 군대가 홍경래난에 임하여 3만여 명의 백성을 도륙하고 정주성에서는 항복한 성민 2900명 중 열 살 미만 남자 아이와 부녀자들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을 참살한다. 이 정주 참살은 한민족이 탄생한 이래 가장 참혹한 대국민 학살사건일 것이다.

정조는 재위 18년에 무과를 보고 109명의 장신을 선발한 적이 있다. 정조는 이때 무인의 중요성과 발탁의 방법 등에 노심초사를 하며 장신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거듭 보인다. 특히 지방과 중앙에서 뽑는 무인들의 수준 차이가 있어 가위다리니, 바둑판 정치니 하는 말이 나돈다니 이런 일이 없어야 하겠다는 훈시도 한다. 바둑판 정치란 돌은 놓고 싶은 사람 마음이란 뜻이다. 사실 정조는 바둑을 두지는 않았지만 바둑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니다. 세자시절 시강원 설서였던 홍국영이 주변인과 바둑을 두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적도 있다.

선조(先朝) 때에도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 관청벽에다 게시하고 무사들을 짝지워 채용하는 현상을 철저히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서 선전청(宣傳廳)에서 월천하는 것을 도리어 전조(銓曹)에서 통의(通擬)하는 나쁜 규례를 본 따 방안(榜眼)이 한 번 나오자 문득 미리 예측하고 구별하며 인물이 정해지기도 전에 뒤따라 계산하고 안배(安排)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누른 것을 뽑아 흰 것에 맞추는 식으로 하고, 지방에서는 도(道) 안의 고을을 단위로 하여 인재를 선발하기 때문에 얼룩진 것이 점박이 말을 탄 것과 같고 알록달록한 것이 숨어있는 표범과 같다. 시속에서 이른바 가위다리와 바둑판 무늬의 정사라는 것이 이와 근사하다. 이 무리들이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동시(東施)가 서시(西施)의 찡그린 얼굴을 흉내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버릇은 문관의 경우에도 금지되어야 하겠는데 하물며 무인의 경우이겠는가? 무인에 대한 일은 무장(武將)이 통할(統轄)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서울의 무인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빠뜨린 것이야 추후에 월천(越薦)할 수 있지만 지방의 무인 가운데 재주를 자진 자들은 누가 두루 살피겠는가? 지방이나 서울에서 고르게 혜택을 입혀 채용하는 것이 어찌 단지 여러 무인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할 뿐이겠는가? 또한 하늘의 화기(和氣)를 맞아 오기에도 충분할 것이다. 이 뜻을 여러 장신(將臣)들은 잘 알라.”

-조선실록

정조가 무반들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성장해 순무군의 중요 장수들이 되어 홍경래군의 토포에 참가, 잔학사를 펼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순무군의 중군장이었던 유효원은 외로운 성안에 겨우 숨만 붙어 있으면서도 더 강력하게 대든다는 조선 백성의 함성을 실록에 전하면서도 참상을 진두지휘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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