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141회/ 12장 유소사(兪召史) (9)
[연재소설 벽상검 141회/ 12장 유소사(兪召史) (9)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3.21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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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뛰어난 문장만큼이나 바둑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기력(碁力)은 '본인방 수영'과 두었던 6점국(局) 기보가 전한다. 도무지 본인방 수영이 판을 짜지 못한다. 이 기보는 한번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원본이 없는 전개본(누군가의 소개작품)이기 때문이다. 허나 훗날 본인방 수영은 김옥균의 기력이 자신과 두점 치수였다 토로한 바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을 한 김옥균은 그곳에서도 동지들과 '두산만' 계열의 우익들과 접촉을 하면서 재기를 노리자 일본정부는 그를 '오가사와라'로 연금을 시킨다(1886. 6월). 오가사와라는 일본 본토에서 1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절해고도로 지금도 주 3회 왕복하는 배편으로 25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다. 당시 민가 수백 호에 인구 수천 명의 미개한 섬이었다.

김옥균은 이 절해고도에 고립되어 고독한 27개월의 징역 아닌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이런 섬의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망명객이 대우(?)를 받을 턱이 없다. 이 당시 고독한 김옥균의 마음이 담긴 시 한 편이 유길준의 글 속에 전한다.

'병아리 십여 마리를 얻어 길렀더니
(養得鷄雛十許頭)

틈만 나면 서로가 다투는구나
(時來挑鬪沒因由)

몇번인가 홰를 치다가 멈춰서서
(數回還停立)

서로가 바라보다 문득 그치더라
(脈脈相看便罷休)

◀ 김옥균, 오가사와라 시. 글씨 유길준.


병아리 십여 마리를 얻어다 길렀다고 한다. 그처럼 김옥균의 섬 생활은 곤궁했다. 딱히 누가 지원을 했던 것도 아니다. 김옥균은 이 섬에서 장장 3년여(27개월)를 버텨야 했다. 김옥균은 한문서당과 바둑교실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섬에 문화적 소통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섬에는 그저 깨복동이 아이들이 천자문 한줄도 모르면서 뛰어 노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김옥균은 아이들을 모아 한자와 더불어 바둑을 가르쳤다.

김옥균은 동경에 오가사와라까지 호송을 책임졌던 순경에게서 선물받은 바둑판과 바둑알이 한 조 있었다. 이 기물이 김옥균의 곤궁한 섬 생활의 활력과 도움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에 대한 존경이 섬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때 본인방 수영이 오가사와라를 방문한다. 본인방 수영은 3개월을 섬에 머물며 김옥균과 천 판의 바둑을 둔다. 절정 고수 본인방이 바둑이 재미있을 턱이 없다. 그저 협객 기질을 타고난 본인방 수영의 김옥균 사랑이 느껴질 뿐이다.

수영이 섬을 떠나던 날 김옥균은 작은 배를 타고 그가 타고 떠나는 큰 배를 몇 시간이나 쫓아가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김옥균은 이 섬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아이들은 이 집에 십수 명이 모여 바둑을 배우고 공부를 했다.

김옥균이 오가사와라에서 바둑을 가르쳤다는 증언한 사람은 평생을 김옥균연구에 바친 금병동(琴秉洞, 80)이다. 김옥균에게 바둑을 배워 훗날 오가사와라의 고수로 행세한 사람이 몇 있다고 한다. 지금도 오가사와라 섬에는 김옥균이 아이들을 모아 한자와 바둑을 가르친 집터가 남아있다.

국내에 김옥균 연구자가 한명 더 있다. 지방의 기자로 청원군수를 역임한 '오효진'이 그 사람인데 필자는 김옥균에 대해서 그분보다 많이 아는 학자를 본 적이 없다. 과연 이 땅에서 누가 김옥균을 연구하는 학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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