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26회/ 3장 군란(軍亂) (2)
[연재소설 벽상검] 26회/ 3장 군란(軍亂) (2)
  • 이 은호 작
  • 승인 2020.10.0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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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에 태어나 1898년 일흔아홉에 사망한 인물이다. 대원군은 1863년 그의 차남이 철종의 후계를 이어 왕위에 오른 덕분에 국가에서 받은 칭호다. 마흔넷에 한 나라의 국왕의 생존한 아버지가 된것이다. 대원군의 이 이력서를 놓고 역사를 희극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원군의 젊은 시절을 코미디로 만든다. 가난하고 헐벗고 악랄한 안동김문의 견제까지 받아 짐짓 광인 행세까지 하며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자못 굳건하여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최근에도 저널의 칼럼을 통해 말할 정도다. 그러나 사실 대원군은 파락호였던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만약 대원군이 파락호였다면 그의 차남이 철종의 후계를 잇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정은 파락호 대신 생부 없는 군왕을 찾았을 것이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은 27세인 1846년 수릉참정도감 대존감과 종친부위사당상으로 '당상관' 대우를 받으며 녹봉을 받는 생활을 했다. 그는 31세 때에 오군영 도총관을 역임하며 나름 종친부의 유력자로 품위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가까운 종친은 벼슬을 할 수 없는 반면 조정에서 일정한 녹봉을 주어 종친의 품위를 유지하게 했다.

특히 영조 이후 누대의 국왕들이 손이 귀한 탓에 철종시대에 와서는 가까운 종친이 불과 몇 안되는 때인지라 종친의 삶은 그리 피폐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젊은 시절 안동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1860년 안동김문과 갈등을 겪던 경평군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대원군이 중재에 나서 안동김문의 체면을 살려주는 장면은, 오히려 대원군의 위상을 돋보이게 할 뿐 파락호니 와심상담이니 하는 말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근거라고는 매천 황현이 풍문으로 들었다는 대원군의 방정치 못한 생활을 거론한 것을 박종화 유주현 등의 소설가들이 작문한 게 전부다. 황현이 전한 대원군의 모습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저주와 욕으로 가득한 황현의 매천야록은 참고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책이다. 대원군을 파락호였다 지목한 논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대원군이 안동김문을 몰아내고 자신의 공고한 정치체계를 구성했다 주장하는데 이 말도 근거 없는 말이다. 대원군은 안동김문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대원군의 집권기간에도 안동김문은 영의정 김병학, 어영대장 김병기 등 십여 명이 조정의 중요 자리를 차고 앉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의 일방독주는 허락되지 않았겠으나 세력이 특별하게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김옥균도 안동김문의 비호(?)를 받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김옥균 개인이 아무리 능력이 탁월했다 해도 문중의 지원 세력이 없었다면 30대에 불과한 그가 한 당파의 영수로 불리기는 힘들다.

대원군의 40대 초반에는 정원용, 김좌근, 김흥근이란 삼신(三臣)이 있었다. 이들은 신정왕후(1808-1890)의 지원을 받는 풍양조문과 협조 또는 갈등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을 좌지우지할 때였다. 대원군은 이들 3인과 모두 사이가 좋았다. 대원군은 처신이 능수능란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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