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58회/ 23장 운산광산 (4)
[연재소설 청룡도] 158회/ 23장 운산광산 (4)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6.0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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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은 문전성시였다. 조선은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은 모두 서북으로 몰려드는 듯했다. '박천' 곳곳에 개설된 크고작은 광산은 새로 발견된 낙원이라도 되는 듯 품을 팔고 그 품에 기대어 먹고살기 위한 그들의 가족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순조초기에는 계속 흉년이 들었다. 특히 1808년과 10년 사이에 흉년은 정도가 심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 이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년 갑술년 연간의 기근은 농부가 다 죽어서 열 집에 아홉 집이 비었고 백 명에 한 명이 살아남았을 정도다. 그런데도 세금은 전년 그대로여서 남아있는 백성들을 때리고 벗겨서 경을 치고 부역까지 더욱 증가시키니 조선의 백성들은 말라 죽는다.

정약용은 당면한 엄혹한 현실에서 조정과 위정자들이 전혀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헛발질만 하는 모습을 다시 기록한다.

-부귀한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 자라 원(현감, 군수)이 되어 술과 고기가 질탕하고 음탕과 교만으로 날을 보내도 조정은 말이 없고 묘당은 잠을 잔다. 원통한 사람 호소할 곳 없고 억울한 사람 신원을 할 곳 없다. 고혈을 빨리고 닭과 개까지도 모두 빼앗기니 논밭은 황무지로 버려진다.

정약용은 당시대를 사진처럼 실사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초근목피로 내몰리고 있는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위정자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에 한양에 큰 화재가 일어나 피해가 막대했다. 화재사건은 조선의 두통거리였다. 특히 한양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하면 큰 화재가 되고는 했다. 그것은 처마와 처마를 잇는 초가들과 목조건축인 기와집이 화재에 취약한 탓이다.

조선시대 한양을 반쯤 태운 화제사건이 몇번 있었다. 세종초기에 팔천 호가 불탄 한양화재는 세종의 정치적 안위를 위협할 정도였고 순조 때의 두번의 한양화재도 그에 못지 않았다.

"한양에 큰불이 났다면서?"

홍경래가 막하회의를 소집하고 우군칙에게 물었다. 우군칙은 경기도와 한양을 돌아본 후 박천으로 돌아와 있었다. 광산에는 홍단의 수뇌부들이 전부 합류해 있었다.

"오백여 호의 집이 불타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심이 말이 아니겠군?"

"시절이 어수선하니 하늘의 응징이란 말이 백성들 사이에 급격하게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늘의 응징?"

"형님,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온 듯합니다."

우군칙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도열해 앉아 있으면서 모두 가슴을 폈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김선비 생각은 어떠시오?"

홍경래가 김창시를 보며 물었다.

"사서에 백마역을 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과연 지금이 그때인 듯합니다."

김창시가 백마역(白馬驛)을 말했다. 입으론 청류를 말하면서 행동은 온갖 사악한 짓을 일삼는 유학자들을 죽여 탁한 황하에 넣어 그 물을 맑게 한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조선 위정자들을 비꼬는 말이다. 책은 책이고 나는 나란 인간의 속된 이기주의에 가장 충실했던 조선 유교의 몰골을 잘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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