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암살과 관련된 몇 가지 약술(속)
[기획] 암살과 관련된 몇 가지 약술(속)
  • 윤영상
  • 승인 2020.05.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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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시역(山市驛)
  1929년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 이하 한족총련)에서는 농촌자치조직으로 농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산시참에 정미소를 설치해 운영했다. 홍성의 호명학교 설립 이후로 영안의 한족총련에서도 후학들에게 일반학과의 공부와 군사훈련도 병행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경제문제는 농촌에서 실습으로 자급자족하게 했다.
  당시 동포들은 일본군들로부터는 생명의 위협을, 경제적인 면에서는 생계의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의 전투력의 보전은 북만주지역 한인사회의 안정을 위한 노력과 이념적으로는 동일했으나 현실과는 상충했다. 경신참변을 겪으면서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재만 한인사회가 크게 위축되어 군자금은 김좌진의 생각만큼 잘 모이지 않았다. 대한독립군단의 지속적 군사력유지만이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이 가능하다는 신념에서 김좌진에게 군자금 모금은 끈임 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최우선 과제였다.

◈ “소설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교사 공범”  
  2005년 무렵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소설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 등 12명을 선정하였다. 국가보훈처는 김좌진 장군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문화부는 김 장군 암살 사주범의 동거녀를 ‘3월의 문화인물’로 기리는 일이 벌어졌었다.
  이 일과 관련해 보훈처 국장을 지낸 모씨가 “문화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강경애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암살 교사 공범”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항일 무장투쟁의 지휘관인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는 데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강경애가 과연 청소년의 귀감이 될 인물이냐”는 주장이었다. 문화부는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선정위원회의 추천으로 선발을 한 다음, ‘친일행적’ 조사 등 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라 선정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 답했다. ‘김좌진 장군 암살 교사 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 암살 교사 음모에 관여했다고 주장하는 문건은 ‘독립운동대사전’(광복회),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이강훈(李康勳·1903~2003) 자서전-민족해방운동과 나’(제3기획), ‘이강훈 역사증언록’(인물연구소), ‘일제하36년-독립운동실록’(동도문화사) ‘흑룡강성 해림시(黑龍江省 海林市) 김좌진 학술 토론회 자료-박기봉(朴奇峰)’(조선족민족사학회) 등이 있다.
  이강훈 옹의 증언은 강경애와 김봉환(金奉煥·일명 김일성) 두 사람이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松島)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朴尙實)을 사주해 1930년 1월24일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강훈은 만주에서 신민부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암살 당시 사회장 ‘대변인’을 맡았고 광복회 회장을 지낸 분이다. 1926년에는 백두산 근방에서 신창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33년 체포돼 15년형을 받았다.
  ‘일제하 36年-독립운동실록’은 김좌진 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한 이강훈, 정환일(鄭煥日), 임기송(林基松)씨 등을 이이녕(李二寧)이 인터뷰한 것으로 강경애가 김봉환과 함께 장군을 암살 교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했다.
  박기봉(朴奇峰)은 1993년 해림市 조선민족사학회 주최 토론회에서 “김봉환이 일제영사관에서 제기한 교환조건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체형도 받지 않고 쉽사리 석방될 리는 만무하다. 일제 하얼빈령사관에 귀순한 변절자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 일본경찰 마쓰시마의 미인계 책략
  밀양 출신 김봉환은 동래 범어사(梵漁寺)의 승려로 3·1 운동 당시 범어사 ‘학림 의거’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1년6개월 형을 받고, 같이 승려생활을 하던 김성숙(金星淑)과 북경으로 오게 된다. 북경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여 활동을 하다가 공작책임을 받아 북만주로 와서, 당시 독립운동의 요충지인 해림에 정착했다.
  1927년 봄, 김봉환은 해림역(海林驛)에 도착해 양주동(梁柱東)과 헤어지고 간도로 옮겨온 여류문인 강경애와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김봉환·강경애는 신민부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투고하면서 수많은 민족진영 간부들과 접촉했고, 평도 나쁘지 않았다. 김봉환·강경애가 신민보에 투고하는 글이 적색(赤色)경향을 띠자, 하얼빈영사관의 마쓰시마(松島) 경부에게 체포됐다. 당시 영사관은 외교공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찰조직과 유치장 시설까지 갖추어 암약하고 있었다.
  하얼빈에 온 김봉환을 체포한 마쓰시마는 한국말에 능통한 독립운동가 취조 전담답게 김봉환이 혁명가 행세를 하기는 하나 첩까지 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았다.
  마쓰시마는 역시 수배 중이던 강경애를 하얼빈영사관 유치장 면회실에 불러내어 두 사람을 압박했다.  
  조선총독부가 이광수(李光洙)의 애인 허영숙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있는 이광수를 꾀여 입국시켜 전향시켰던 미인계를 차용했다.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상해 임정에 투신했다가 귀국했음에도 일경으로부터 무사히 풀려나왔을 때, 많은 식자들이 춘원을 의심했다. 이처럼 역사기록에서는 이면의 그림자를 은폐한 채 빛만을 내세우며 한쪽 눈을 가리는 내용이 적지 아니하다.
  강경애가 마쓰시마의 변절 요구를 수용했고, 그 결과로 몇 년의 옥고를 치러야 할 김봉환과 강경애는 석방됐다. 강경애의 작품 대부분은 소설 ‘어머니와 딸’ 연재를 시작으로 1931년부터 1938년까지 간도에서 씌어졌다. 이강훈이 진술한 것은 강경애가 장하일과 결혼하기 전인 1929년의 일이다. 

◈ 암살
  1930년 김좌진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박을 갖고 있고 자신들의 이상을 펼칠 활동공간이 필요했던 아나키스트들과 결합해 한족총련을 결성했다. 성동사관학교의 500명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매호당 6원의 자금 징수’는 불가피한 측면으로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에서 항일과 반공을 같은 가치처럼 대했던 것은 볼셰비키 혁명 후의 공산주의지도부가 러시아 황제보다 더 악독한 독재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합이 무모한 도발로 연결되어 공산주의 세력이 ‘김좌진 제거’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배경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김봉환은 자신이 믿는 공산청년회 박상실(朴尙實)에게 총을 전달하며 암살을 부탁했다. 산시정거장 부근 개천에는 족제비가 우글거려 겨울이면 족제비 사냥꾼이 득실거렸다. 박상실은 산시에 머물면서 족제비 사냥꾼으로 눌러 있으면서, 김 장군을 경호하는 청년들도 사귀어 경계심을 풀게 했다. 1930년 1월24일 오후 3시, 박상실에게 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김좌진이 산시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 도정(搗精)공장을 살피러 나설 때, 박상실이 그 뒤를 밟았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하는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을 당하지 않도록 마련한 정미소였다. 측근 청년들은 고강산(高崗山) 경호대장과 함께 철둑 너머로 마실을 갔다. 마침 일요일이라 인적이 한산했다.
  오후 4시, 자택에서 3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까지 따라간 박상실은 장군이 정미 기계를 둘러보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순간, “빵! 빵!” 총을 두 발이나 발사했다.
  일송정 푸른 소나무가 꺾인 눈물 글썽한 사건이 벌어졌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비보가 전해지자 전 만주와 국내에서까지 수천 명의 조문객이 人山人海를 이뤘다. 
  사회장으로 봉장(奉葬)하여 북만 거류동포 외에도 중국인도 많이 참가해 “조선의 왕이 죽었다”를 외치면서 슬퍼했다. 엄동설한에 땅을 팔 수 없어 우선 초빈(初殯)했다가 4월에야 해림과 산시 사이의 석하역(石河驛) 동북방 산록에 안치했다.
  암살 후 한족총련 군사위원장 이붕해(李鵬海)의 지휘로 즉각 흉한을 추격해 해림역 부근 아지트에 있던 김봉환을 잡는 동시에 문서를 압수해서 하수자가 박상실(朴尙實: 일명 朴尙範)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김봉환은 총살 처단하였다.
  박상실은 중국 군경에게 체포되어 행동대장 고강산(高岡山)의 증언으로 사형을 받았다.

◈ 강경애씨가 김봉환씨와 함께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가담한 사실은 진실인가
  독립운동사 전공자인 이현희(李炫熙)는 “소설가 강경애씨가 민족지도자인 김좌진 장군을 죽인 사람이라는 말을 이강훈 선생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고 했다. 용정(龍井)에서 강경애에 대한 평가는 1999년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듯 용정에서 강경애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그녀가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간여했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했다.(‘용정 3·13기념사업연구회’ 김근화)그러나 장군의 암살을 둘러싼 진실은 아직도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암살 사주자는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으로 하얼빈영사관 압박에 변절한 친일 주구배(走狗輩)였다. 하수자는 박상실이었으며, 막후조종자는 하얼빈영사관 마쓰시마였다.
  서울대 신용하(愼鏞廈)는 “강경애가 일제의 사주로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개입했다는 것은 정확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면서 “김좌진 장군은 일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적기단(赤旗團) 간도지부가 감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박상실(朴尙實)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근래 연변에서는 조선공산당원인 이복림이라는 설도 있다. 김좌진의 암살범이 박상실이 아니라 공도진(公道珍: 일명 李福林)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 양환준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연변문사자료, 제4집, 1985년 11월) 공도진은 조공 만주총국의 지시로 김좌진을 살해한 후 반일유격대에 가담해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臨時省委) 조직부장을 역임했다가 1937년 전사했다는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회피하기 곤란한 쓰라리고 거북스러운 상처가 ‘암살’이라면 우리에게는 횃불이 사라진 봉화대처럼 근대 한국 정신사의 ‘공허하나 잃으면 절대 안 되는 유산’이 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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