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24회/ 18장 의주만상 임상옥 (5)
[연재소설 청룡도] 124회/ 18장 의주만상 임상옥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4.06 17: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김조순을 조금 더 알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김조순은 정조가 가장 신임하던 산하 중의 신하였다. 정조시대는 인재의 로망이 펼쳐지던 시대다. 정조시대에는 필설로 설명키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백화쟁명했었다. 그들은 정치 경제 문화 천문 지리 수리 등 온갖 분야에서 자신만의 독보적 사고와 생각을 하며 그것을 말로 또는 기록으로 남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조는 이 설림설군(舌林說群)의 인재의 숲에서 오직 한 그루 나무를 지목하고 그 나무에 자신의 후기 정치인생을 걸었다. 그 나무가 바로 김조순이다. 정조는 25세의 역강한 나이로 군왕이 되었다. 정조는 오랜 세손 생활과 특유의 독서욕과 학문의 습득 능력으로 역강한 나이에 당대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정조는 4살 때(1755) 남유용으로부터 '소학초해'를 배우고 다음해 '서지수' '김양택'으로부터 '동문선습'을 배웠다. 소학초해와 동문선습으로 기초적 한문을 습득한 정조는 왕세손이 된 후 홍봉한과 당대의 산림의 영수 '김원행' '송명흠'으로부터 본격적인 학문을 배우게 된다. 홍봉한 김원행 송명흠 등은 이이-송시열-이간으로 이어지는 노론 낙론계의 학자들로 정조 또한 은연 중에 노론 낙론의 학풍에 젖어들게 된다.

정조는 1762년경에 효경, 소학, 논어, 맹자, 시경을 독파하고 사단칠정에 대한 이해를 얻는다. 나이 11-12세 때다. 정조는 18세가 되던 1772년부터 스스로 저술 활동에 나설 정도의 학문의 깊이를 얻고 삼비, 오전, 구구, 팔색, 구류, 백가를 모두 통독, 왕위에 오르던 25세 때는 당대의 학계를 주도할 만한 학자의 반열에 올라선다.

정조가 자신의 일기인 일득록에 스스로 문왕의 후계자요 조선 산림의 영수로서 공맹의 법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신할 정도의 자부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이런 정조가 45세되던 1776년 김조순을 불러 세자와 인사를 시킨 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주고 더 나아가 장인 사위간의 혈연적 인연을 명령한다. 정조는 실록에서 김조순이야 말로 자신의 신하들중 물과 같이 맑고 사심이 없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김조순도 정조에게서 나라를 건사해 나가기 위해서는 외척의 힘도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록을 자신의 문집인 풍고집에 기록하고 있다. 풍고집 속의 '영춘옥음기'에는 정조와 김조순의 내밀한 관계가 여실하다. 정조는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외척의 정치참여도 불사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정조의 정치인식과는 많이 다르다.

세도정치의 원흉이자 안동김문의 종장인란 이미지로 남은 김조순은 바둑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당대의 바둑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의 문집에는 여러 건의 바둑기록이 전한다. 그 중 평안도를 구경하며 황학루라는 누정에 올라 쓴 기록이 있다.


내가 이 누각의 주인이라면 산수와 더불어 이곳에서 살고 싶다. 업무도 이곳에서 볼 것이다. 수하 몇 명 거느리고 관아와 노복에게 심부름 시키면 될 것이다.

바둑 고수 몇 명과 기생도 몇 거느리고(一能奕者一妓年可三四十者) 업무를 보다가 심심하면 노닐고 활도 쏘며 일하고 즐기는 흥은 마음을 살찌우는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이곳을 올려고 하다 그러하지 못하다가 오늘(1824년) 이곳이 오니 종신토록 노닐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서북의 절경에는 황학루를 꼽을 만하도다.

-풍고집 황학루중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