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청산리대첩 승전 100주년 특별기획 / 봉오동과 청산리 전쟁(하)
[기획]청산리대첩 승전 100주년 특별기획 / 봉오동과 청산리 전쟁(하)
  • 윤영상
  • 승인 2020.03.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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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청산리 가을바람’
청산리대첩은 백운평에서 시작해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서구, 천보산전투와 홍범도부대의 남완류구, 고동하곡전투에 이르기까지 화룡 일대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10월 21일부터 청산리골 첫 교전 이후 화룡 일대에서 벌어진 6일간, 10여 회의 전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이 된다.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자서전「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편찬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는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浦潮軍) 14사단 4,000여 명, 11사단·19사단·20사단, 그리고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000여 명 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었다.
일본군의「대불령선인(對不逞鮮人) 작전에 관한 훈령」에는 “해외로부터 무력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해서는 이를 섬멸시킬 타격을 가한다”라고 해 도강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훈춘사변으로 중국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은 독립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철수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동포사회의 피해 때문에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
홍범도는 ‘잠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했다가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국내진공에 들어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해야 한다”면서 한 달 걸려 9월 20일 께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했다. 안무(安武)가 이끄는 군사들도 9월 말께 이도구 방면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도 야간행군을 강행하여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 깨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했다.일본군과 독립군은 정보전으로 서로 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은 처음에는 피전책을 택했다가 일본군이 쉽게 회군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래 김좌진은 일본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여 결전하기로 작술을 변경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한국인 촌락 방화와 학살을 보고 심리적 동요를 감추기 힘들었다. 독립군들이 첫 번째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청산리 백운평 직소택이었다.
독립군은 10월 21일 아침 8시쯤 200여 명의 전위 중대를 백운평 깊숙이 끌어들였다. 직소택 일대는 지금 보아도 ‘ㄷ’자 형태의 가파른 계곡의 끝으로 섬뜩하다.
상대는 아즈마마사히코(東正彦) 소장이 이끄는 아즈마지대(東支隊)였는데 중화기로 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야마다(山田) 대좌의 연대는 야스카와(安川) 소좌의 부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절벽아래 좁은 길로 미처 상상조차 못한 채 600정의 총구 앞으로 들어왔다.
‘말똥이 싸늘하게 식었군.’ 야스카와는 선두에서 조심스럽게 사방을 훑어보면서 말에서 내렸다. ‘응, 적어도 5시간은 지난 말똥들이다. 지금 즉시 전 부대원은 앞으로 진격하도록!’‘이봐, 요시가와! 이상하군. 이쪽에 있는 말똥은 따듯하군.’ 야스가와의 금빛 견장이 아침햇살에 번쩍거렸다.
‘이 자식들! 탕···!’
깍아지른 절벽 위의 이범석이 사격신호로 쏜 총탄에 시바다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이어서 야스가와의 가슴에 나중소 참모장이 직접 잡은 맥심기관총 중 한발이 작렬하자 어깨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제야 일본군들은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채로 눈먼 총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착한 본대 역시 산포와 기관총으로 응전했으나 독립군의 위치를 알 수 없어 화력만 낭비했다.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 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섬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다”라고 전한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甲山村) 부근으로 이동해 천수평으로 들어온 카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를 타켓팅하여 매복했다.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병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또 다시 매복 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호된 불벼락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는데 박격포를 거치시키려 숙영지에서 기어 올라오던 놈, 탄띠를 벗고 동료시체를 어루만지며 참호로 기어들던 놈들이 하나 둘 고꾸라졌다.
독립신문은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군정서군은 2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드디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 비밀병기 ‘맥심기관총’에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다
일본군은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켜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군정서군은 이어서 어랑촌에서 아즈마 본대와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어 군정서군을 포위하고 산포와 기관총으로 군정서군을 공격했다.
김좌진은 먼저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자 어랑촌 서남단의 874고지를 선점했다. 허나 연이은 전투로 군정서군은 지쳐있었다. 기관총 중대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났다. 혈전을 전개하는 도중에 홍범도 연합부대가 지원하러 왔다.
홍범도 부대는 22일 새벽 완루구 전투에서 승리을 거두고 이동하던 중에 군정서군이 어랑촌에서 포위되어 혈전을 벌이고 있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 지원하러 온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군정서군이 선점하고 있는 고지의 바로 옆 고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맹공격했다.
수세에 있던 군정서군이 화력을 모아 먼저 남완루구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자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북로군정서의 복장은 무명 홑겹에 카키색 물을 들이고 각반을 둘렀으므로 외형상 일본군과 비슷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는 “적이 적군을 서로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록들은 청산리전투의 실제적 일면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이다.
어랑촌 전투는 저녁이 되어 끝났다. 일본군은 기병연대장 카노 대좌를 비롯하여 1천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나왔다. 독립군도 이 전투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북로군정서군은 이후 23일 맹개골 삼리 속에서 적 기병 10여 명을 사살한 전투, 만기구(萬麒溝)전투, 24일 쉬구전투, 천보산(天寶山) 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던 일본군 중대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천보산 전투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냈다.
홍범도 부대는 25일과 26일에 걸쳐 고동하 전투에서 일본군 2개 소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세웠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일본군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고, 야간 매복습격을 두려워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간도침입 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만들고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하얀 눈 덮인 백두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벌어진 이 모든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는 일본군 카노 연대장을 비롯해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사 도합 800명을 살상하였다고 적고 있다. 앞장 선 카노연대의 궤멸은 아즈마지대의 전투력을 거의 불능 상태로 몰고 갔다. 기록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군은 참혹한 지옥을 경험했다.
청산리 전투 때 썼던 독립군의 탄약과 무기를 보면, 김좌진의 비밀병기는 현대사의 게임체인지 맥심기관총이었다. 일본군 캐틀링기관총의 회전격발식과 다른 단일 총신 방아쇠 격발식으로 분당 500발을 발사하는 수냉식 기관총이었다. 아프리카 수단 전투에서 성공적 승리가 전해지자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수입하던 병기가 체코군을 통해 입수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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