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과 청산리 전쟁 (상)
봉오동과 청산리 전쟁 (상)
  • 윤영상
  • 승인 2020.03.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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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키기 위해 진격하다’
  1919년부터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일제 역시 만주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으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드디어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쳐낸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부르하통하’ 지류와 백두산 자락 산록에서 벌어졌다.(만주어로 ‘부르하통하’는 ‘버드나무가 많은 강’이란 뜻)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시켰다.
  일본군 19사단 1연대 3대대장 야스카와지로(安川二郞) 소좌는 ‘아군 전사자 50~60여명이란 숫자가 납득이 갈 수 있도록 독립군도 사살 31명이라고 사단장 각하께 보고해!’라며 억지 전과를 조작한 후 삼둔자(三屯子)촌에 거주하는 조선인 동포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리고는 아라요시지로(新美二郞)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으나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

♧‘무적 황군 신화’ 깬 봉오동 전투
  함북 종성군 나남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제19사단은 즉각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넜다. 추격대는 19사단 보병 73연대 등에서 차출한 정예 부대였다.
  패퇴를 만회하기 위한 야스카와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방면의 적을 추격해 일거에 적 근거지를 소탕하겠다”면서 봉오동 25리의 긴 골짜기로 들어왔다.
  봉오동은 산골짜기가 겹친 지형으로 두만강의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지형에 익숙한 함경도 포수출신의 독립군에게 유리한 싸움터인 것은 건 마찬가지였다. 군사학적으로 지형을 지배하는 부대는 적들에게 급격히 포위되거나 결코 패하지 않는 법이다. 최진동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는 주민들을 산중으로 대피시키고 이화일(李化日)에게 일본군 유인을 맡기는 한편 각 중대를 산 위 요지에 배치시키고 자신도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면 북단에 매복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군들의 희생 또한 ‘봉오동 승첩’이라는 단어 안에 매복했다.  
  월강추격대대는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유인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봉오동 사지로 쫓아 들어왔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 장군은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됐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전투 결과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하  고 이 승첩을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선언했다. 봉오동 승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는 “급(急)사격으로 적에게 120명의 사상자를 낳게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비슷하게 얕보던 일제는 경악했다.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예상 밖으로’ 당한 충격적 참패에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는 독립군 ‘초토화’를 위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고자 패전 직후 육군대신에게 “대안(對岸)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은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 조직을 이루고 있습니다”(조선군사령관 제102호 전보)라고 보고했다.

♧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리는 한편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했다.
  이때 동북지역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이 일본의 조종에 의하여 왕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연길지역 제2혼성여단 보병1단장 맹부덕(孟富德)에게 내렸다.
  ‘일본군의 간도침입을 막기 위해 부득이 출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독립군은 지금의 근거지를 삼림지대로 옮기라’는 전문으로 맹부덕은 독립군 대표들과 비밀협상을 맺었다. 한마디로 북로군정서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일로 인해 당시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를 잘 이끌어오던 김좌진과 서일이 서로 대립한다. 서일의 총재부는 전투요원들은 아니어서 대부분 가족들과도 함께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총재 서일은 후일을 기약하여 더 오지인 북만주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
  사령관 김좌진은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바로 독립운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곳으로 이동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놓고 북로군정서 ‘총재’와 ‘총사령관’은 팽팽하게 대립하여 총재부와 군사부가 나뉘어 길을 달리한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다. 총재부는 밀산의 당벽진으로 향하여 어느 정도 보호막이 있는 대종교 동도본사가 있던 밀산으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한다.
군사부는 화룡방면으로 길을 나서 청산리로 이동하게 된다. 군사부는 애초 계획대로 백두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밀영을 조성, 전투력을 보존한다는 계획 하에 이뤄진 행군이었다.
  1920년 9월 17일 북로군정서는 피땀으로 다져 놓은 십리평을 뒤로 하고 고난의 장정에 올랐다. 거기에는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독립군 단체 간의 마찰과 노선 이견도 남아 있고, 허기와 추위에 떨어야할 현실도 동승하였다. 이로써 북로군정서의 생사는 오로지 김좌진의 손에 내맡겨지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청산리대첩은 알지만 비정규전을 염두에 두고 고심했던 북로군정서가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낸 고난의 장정은 잘 알지 못한다. 우리 항일무장투쟁사에 전설로 남아 오랜 담금질이 되어준 ‘청산리대첩’도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민족적 양심을 지켜낸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초가 담겨 있다.
서대파골 삼번목촌에서 첫 야영을 했다. 거기까지는 북로군정서 대원이면 몇 번씩은 오간 길이었다.
서대파골을 벗어나고, 대감자에 도착하자 대기 중이던 무관학교 입학 지원자 50명이 귀향을 거부하고 함께 장정 참여를 요구했다.
  김좌진은 즉석에서 시험을 치르고 데리고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길에 총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소년병을 동행시킨다는 마음의 짐은 무겁기만 했다.
  대감자를 떠나면서 북간도 한가위의 밤바람에 이래저래 고향 ‘홍성 호명학교의 어린 제자들’ 생각도 났음 직하다. 함께 송편이라도 빚는 상상을 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감자에서 총재 서일 일행은 서로 길을 나누어 밀산을 향해 북행길에 올랐다.
  열흘간 장정을 마친 북로군정서는 부르하통하가 흐르고 산이 바람을 막아 주는 동불사 북촌에서 일단 추석을 보내기로 한다. 북로군정서군 누구나 잘 아는 곳이다. 부르하통하는 청산리대첩이 있었던 그곳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가 모여 용정에서 해란강이란 이름을 얻었다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 연길을 관통하고 두만강에서 비로소 하나가 된다.   얼마간의 겨울나기 준비도 해야 했다. 그나마 북로군정서군은 통일된 개인 군복이나마 지급이 됐지만 무기도, 방한복도 제각각이었다. 목화솜이나 무명 몇 필을 구해 발싸개를 만들고 운이 좋은 이들은 한지를 덧댄 누비 속옷 한 벌 정도 얻었다.
  이 무렵 독립군들의 입장에서도 통일된 노선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일본군이 화룡지역으로 전개를 마친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모인 이들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 지휘관들’이었다.
  연합부대는 10월 13일 하마탕에서 국민회·신민회·의민단·한민회 등 제 단체가 회합하고 행동을 통일할 것을 합의하면서 만들어진 부대다.
  10월 19일, 묘령에서 연석회의가 개최됐다. 일본군이 10월 2일 중국 마적 장강호(長江好)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소재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개된 훈춘사변으로 코앞에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 동원된 것에 대한 대책회의였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회피할 것인가” 하는 두 개 파의 의론이 분분하다가 결국 현천묵 등이 주장하는 논지에 기초해 당분간 일본군의 공세를 회피할 것을 결의했다.
  ‘일본군대가 출동함으로써 이제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리는 알지 못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중국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일본 측은 더욱 많은 군대를 증파할 것이다. 싸울 기회는 또 있다. 지금은 참고 자중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피전책으로 김좌진은 송림동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부하들을 백방으로 달래 후방으로 퇴각했다.
  북로군정서는 현재의 청산리에서 1~2㎞ 더 서북쪽으로 들어가 평양촌을 경유하고, 다시 2~3㎞ 더 들어가 마을 하나가 들어서기에 넉넉한 개활지 백운평에 도착했다. ​지금의 청산리촌은 1932년 이후에 다시금 한인들이 모여들어 재건된 마을이다.
  김좌진은 행군 중에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이 확실해지자 병력을 백운평 위쪽 ‘직소택(直沼澤)’ 부근으로 이동시켜 진영을 갖췄다. 적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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