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성장과 3·1 운동 발생 (상)
장군의 성장과 3·1 운동 발생 (상)
  • 윤영상
  • 승인 2020.02.2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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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은 역사다’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안동 김씨 김형규와 한산이씨 양반가의 둘째로 태어나 17세에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켜 전답을 무상으로 나눠주고 집에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하는 등 매우 깨어 있는 인물이었다.
  김 장군의 옛 저택은 90칸이나 되어 학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며 2천석 가량의 재산은 현재 홍성군 갈산면의 갈산 중ㆍ고등학교 자리에 호명학교를 설립할 수 있게 했다.
  김좌진 장군이 처음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그의 고향인 홍성지역에 퍼져있던 근대의식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홍성은 동학농민전쟁과 1907년 이후 민족운동과 자강운동 등의 중심이었으며 이곳에서 어린 김좌진은 스승 김광호를 만나 의병과 독립협회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 시작했다.


  김좌진이 3살 때 아버지가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형 김경진도 족숙인 김덕규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났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노백린, 유동렬, 이갑 등 신민회 인사와 교류를 넓혀갔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군사학과 전략을 배울 수 있었다.  2년 후인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개화지식인이 벌인 신교육운동에 참여하여 기호흥학회 홍성지회에 가입하고 활동했다.
  1909년 6월경 서간도 이주를 계획하고 국내에 연락 거점을 설치하고 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울 종로의 관수동에 이창양행을 설립하고 소립동에는 영창양행을 설립했다.
  그러던 중 1911년에 친척에게 학교 운영자금을 받으러 갔다가 그 친척의 밀고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5년형을 선고받은 김찬수는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중대장으로 함께 참여했다. 옥중에서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있던 김구 등을 만났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자는 광복회가 조직됐다. 광복회에서는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했다.  
  김좌진은 광복회에 참여해 본격적인 대한광복회 활동 등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다 면소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출옥한 뒤 위폐제작을 위한 기계구입비를
                                                                    마련하는 도중에 일경의 추격을 받자 광복회에서는 김좌진을 부사령에 임명하고 만주 파견을 결정했다.
  이에따라 사관학교 설치와 만주본부의 책임을 맡고 만주로 떠난 것은 1917년 9월의 일이다. 만주로 망명해 대한광복회 부사령에 올랐고 광복회가 무너진 후 북간도로 건너가서는 북로군정서군의 사령관이 되어 1920년,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데 1918년 군자금 마련을 위한 활동 중에 광복회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 등 4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임세규, 김경태는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 3·1운동 후 망명임시정부 속속 수립

     3·1운동은 망국으로 위축됐던 한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거사였다. 이제 민족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응축된 힘은 “4월 23일 낮 12시10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소기(小旗)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발표한 ‘국민대회 취지서’는 결의사항으로 ‘임시정부 조직, 일본 정부에 대해 통치권 철거와 군비 철퇴 요구 등 일본관청에 모든 납세 거절을 결의했다.(약법 1조로 ‘국체는 민주제도’를 결정했고 2조로 ‘대의제도’를 정체로 채택했다.『한국민족운동사료』, 국회도서관, 1979)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지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국내에서만 한성(漢城)·기호(畿湖)·평안도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됐고, 러시아령과 상해에서도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서울에서 국민대회가 준비되는 동안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등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하였다. 1919년께 러시아령에는 50만 명에 달하는 한인이 있었고 역시 교포가 많이 사는 만주와 인접했다는 장점이 있었다.
  빠르게는 1919년 3월 17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군무총장에 이동휘 등을 선임했다.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29명이 모여 각 지방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임시의정원으로 개편되고,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1919년 4월 17일 총독 하세가와(長谷川)는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소요 폭동은 군대에 위임하고 지방의 질서 정리와 민심융화책 등 소요 후의 정리는 지방 행정관헌의 손으로 행하기로 했다”며 소요의 근원이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임시정부가 소요 사태의 근원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전쟁론의 씨가 뿌려졌다.
  간도군정서(間島軍政署)는 1920년대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했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필연적으로 일본군과 대결했다.
  왕청현 춘명향(汪淸縣春明鄕) 서대파(西大坡)일대 50리 지역에 근거를 두고, 총재 서일(徐一), 사령관 김좌진(金佐鎭), 부사령관 김성(金星), 참모장 나중소(羅仲昭)였으며, 단원 1,500명 거의가 대종교도였다.  군비로는 장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및 수류탄 80개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1920년 3월과 6월에는 총재 서일의 격려에 고무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그 근처에 무관학교를 설치해 15세 이상 40세까지의 청장년을 징모하고 간부를 양성했다.
  특히, 국내에까지도 특파원을 보내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청년들을 설득하여 국내를 탈출, 이에 동참하게 하였다. 그 결과 군세(軍勢)는 한때 3,000명 선까지 이르렀다. 재향군인(在鄕軍人)에 상당한 인물을 지방 각지에도 산재하게 하여 일단 유사시에 명령만 내리면 즉각 현역화(現役化)할 수 있는 대기병력으로서의 준비마저도 치밀하게 짜놓았다.

♧ 항일 무장투쟁론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은 2가지로 대분한다. 독립하기에 아직 부족하니 실력양성을 한 다음 자주독립 하자는 측(애국계몽운동)과 초기부터 항일무장투쟁을 하자는 강경파로 대분된다.
  강경파인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이 설립되어 소규모 무장투쟁을  벌이게 된다.
  1923년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지침 활동은 7가살(可殺)로 일본군부 수뇌, 매국노 등 일곱 부류를 암살 대상으로 삼아 일본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리게 하자는 목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정의 두 수뇌인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모두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다.
  대통령 이승만이 미주 교포들의 애국후원금을 독단적으로 사용해 문제가 되었다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지원받은 혁명자금 분배 문제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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