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82회 12장 춤추는 검계(劍契) (5)
[연재소설 청룡도] 82회 12장 춤추는 검계(劍契)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1.30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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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나는 서북에 떠도는 요언이 홍가니 뭐니 하는 검계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거든요?"

"아니, 님자는 포청의 포장이 맞나요? 어떻게 검계가 요언을 퍼트린단 말입니까? 검계는 밤의 무뢰배들입니다. 명화적이니 수적이나 같은 무리들이라 그 말입니다. 그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느냐 그 말입니다."

 

형방이 반문을 했다. 반문의 요지가 논리정연했다.

 

"그럼 홍가는 검계란 말인지요?"

 

"뭐요?"

 

"호호 홍가가 검계냐 그 말이지요?"

 

오포장이 비실비실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형방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홍대인은 검계가 아닙니다."

 

"호호 그럼 뭐지요? 홍단이란 무리들을 거느리고 서북 여러 고을들의 부호들과 아전들까지 끼고 도는 인사가 검계의 패두가 아니면...뭐 반란이라도 꾸미는 집단이란 말인가요?"

 

".......?"

 

오포장이 형방의 눈을 주시하며 여러 방향의 질문을 던졌다. 검계는 역사상에 숙종 15년 처음 출몰한다. 조선의 뒷골목이란 책에도 숙종 15년의 기록이 소개된 바 있다. 필자는 이 기록보다는 다음의 기록을 주목했다. 이 기록은 연구자들뿐 아니라 모든 지면을 통틀어 처음 소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간 이동식(李東埴)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게으르고 법강(法綱)이 해이해졌으며, 검계(劍契)의 이름이 나오기에 이르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무너짐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일종의 무뢰한 무리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黨)을 이루고, 소와 송아지를 팔아서 검(劍)을 차고 다니며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돈을 추렴하여 개와 돼지를 잡지 않는 날이 없으며, 약탈하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고, 능범(凌犯)하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문(朱門)에 횡행(橫行)하여 재상을 꾸짖어 욕보이고, 깊은 규방(閨房)에 돌입하여 부녀자를 때리는 등 분의(分義)를 멸절시키고 기강을 어지럽힘이 거의 여지(餘地)가 없으니 주머니를 털고 상자를 열어 물건을 훔치는 것은 단지 자질구레한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구(司寇)의 직임에 있는 자는 더욱 엄중한 법과 혹독한 형벌로써 간악한 자들을 징치(懲治)함이 마땅할 것인데, 이미 범죄한 사람을 잡아 허술하게 감단(勘斷)하고도 단서가 거의 드러났는데 소혈(巢穴)을 끝까지 조사하지 못하고 싹이 이미 텄는데도 그 뿌리를 캐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방금(邦禁)을 관장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징토(懲討)가 엄중하지 못하여 죄다 제거하지 않았으므로, 사옥(邪獄)의 여얼(餘孼)들이 다시 치열해질 근심이 없지 않으니, 곧 이는 검계(劒契)가 함부로 날뛰던 바로 그 남은 여추(餘醜)입니다.

그런데 도성의 백성들이 점차 물들어 서로 이끌고 저들 편에 들어가고 있는 것은 또한 술의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아! 도하(都下)의 장요(長腰)는 모두 술을 만드는 집에 들어가고, 저자의 어육(魚肉)은 죄다 술집에 돌아가니, 근래에 물가가 오르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생스러운 것은 주로 이런 때문입니다. 진실로 금주령(禁洒令)이 또한 백성을 소요(騷擾)케 하는 단서에 관계됨을 알고 있으니, 비록 전연 금단(禁斷)할 수는 없다 하나, 거리에서 풍성한 안주에 술판을 벌이는 데 이르러서는 어떻게 낭비하는 데에 맡겨두어 무궁한 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추조(秋曹)와 경조(京兆)·포청(捕廳)에 신칙해서 무릇 간귀(姦宄)한 이름이 검계(劍契)에 들어간 자는 한결같이 모두 기포(譏捕)해서 기필코 초절(初絶)할 것이며, 도하(都下)의 큰 양호(釀戶)도 또한 엄금함으로써 그 근원을 막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외(京外)의 사당(邪黨)은 거듭 정탐을 더함으로써 그 조짐을 제거하게 하고, 두 포장(捕將)이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며 그 직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우선 현고(現告)를 받아 아울러 견파(譴罷)의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전 형조판서 채홍리(蔡弘履)는 빨리 간삭(刊削)의 명을 내리소서. 전 아전(亞銓) 이면긍(李勉兢)은 상소하여 처음에는 전망(前望)을 회복시키지 않은 사람으로서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사구(司寇)의 직임에 수망(首望)으로 주의함으로써 요석(僚席)에서 이로 인해 스스로 인책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받아들여 자신의 허물로 삼고, 위축되어 엎드려 사죄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조급하게 헐뜯으며 대단한 기세로 격렬하게 질책하였으며, 심지어는 대신(大臣)과 수작한 것으로 그 말을 변환(變幻)시켜 거짓 꾸며서 말을 만들어 장주(章奏)에 올리기에 이르렀으니, 사람으로서 무엄함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 이조참판 이면긍에게 찬배(竄配)의 율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전 형조판서에 대한 일은 어떻게 다시 감단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면긍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좌상이 차자를 올려 구원함으로 인해 이면긍을 찬배시키게 한 명을 도로 거두었다.

- 순조3년 8월9일-

 


구차하게 여러 설명이 필요없는 현실감과 박진감이 함께 살아있는 역사기록이다. 참으로 조선실록의 살아있는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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