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37회 6장 피바다의 시간(2)
[연재소설 청룡도] 37회 6장 피바다의 시간(2)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0.0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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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아이를 때리고 엽전을 주는 일이 뭐래요?”
가희가 오포장의 행동을 보고 물었다. 그들의 상 위에는 무우국과 조밥 그리고 김치, 나물에 작은 닭 한 마리가 삶아져 나와 있었다.

“호호, 신경 끊고 이거나 먹어.”
오포장은 닭다리 하나를 뜯어 가희의 입을 막고는 자신은 닭의 뱃살을 뜯어 소금을 찍어 입에 넣었다.

“어멋?”
“호호 어머나는 무슨? 그래 초포조생이라 이거지...”
오포장은 작은 입을 오무리며 고기를 씹었다.

“초포조생이 무슨 말이죠?”
“초포가 바다가 된다는 말이다. 초포는 니성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니성이면 계룡산 아래에 있는?”
“호호, 맞다.”
니성(尼城)은 공주시 탄천면과 논산시 노성면 일대를 관리하던 현을 말한다. 조선시대 회덕 송시열과 니성의 윤증이 벌인 유명한 '회니논쟁'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홍경래는 우군칙과 김창시가 만들어 유포시킨 '초포조생'의 유언비어로 해서승룡과 서북용출의 도참을 증폭시켜 서북지역의 민심을 장악했다. 이것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많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정감록은 영조 정조 시대 대여섯 건의 반란사건에 나타난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정감록은 실록과 추국안문서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등 많은 기록에 보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허접함 자체다.

정감록이 역사상에 등장하는 첫번째 기록은 1739년 영조 때와 1782년 정조 때다. 정조 6년에 일어났던 반역 사건의 한 대목을 보자. 조선실록의 기록이다.

해주목(海州牧)에 가두어 놓고 추고한 죄인 안필복(安必復)과 안치복(安致復) 등을 감영의 옥에다 가두어 놓은 것은 조정에서 명한 것이 아니라, 죄수가 공초한 사실의 허위를 확인하려고 내려간 종사관이 소견에 따라 잡아 가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정감록(鄭鑑錄)>에 있어서는 가령 분명히 그의 집에 있더라도 그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니, 그에게 큰 죄가 되지 않는다. 대체로 예로부터 서적 중에 반드시 예언의 서적을 금지하였던 것은 바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것을 금지하려고 한 것이다. 어찌 정정 당당한 조정에서 이를 듣기 싫어서 숨기겠는가?

더구나 내가 지난번 즉위의 초기에 어떤 사람이 안겸제(安兼濟)의 일로 말한 적이 있었으나 내가 안겸제를 죄 주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나의 본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은 예언의 서적에 있지 않고 다만 교화가 시행되지 않고 풍속이 안정되지 않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본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안필복과 안치복에게 이 전교로 일깨운 다음에 갇혀 있는 그의 가족도 모두 방면하라. 오명신(吳命愼)과 이종수(李宗秀)는 더욱이 신문할만한 단서가 없으니, 또한 방면하라. 박경원(朴慶遠)과 박경인(朴慶仁)은 앞에 안필복 등에게 내린 처분의 조건에서 이미 말한 바가 있으니, 지금 중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조카 박서집은 역적의 내막을 고발한 사람으로 사단이 아직 결말나지 않았으니 완전히 방면하기는 어렵지만, 박경원은 연로하다고 하니 이 때문에 가두어 둘 필요는 없다. 박경인도 같이 이 전교로 유시한 뒤에 모두 방면하여 개과천선하기를 꾀하게 하라.

대체로 역적 송덕상의 지역에서 이러한 역모가 있었는데, 그들처럼 향곡(鄕曲)에서 무지한 부류들이 사사로운 안면에 이끌리어 당여(黨與)의 벌을 달갑게 범하였는데, 그 본정을 따져 본다면 잘못이 아님이 없다. 여름에 내린 유시를 경이 과연 일일이 선포하였는가? 그들도 충성하고 싶은 양심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완고히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비밀히 유시한 글 한 통과 문인방을 법에 따라 결안(結案)한 것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 써서 방면한 죄수들에게 주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직접 수령들에게 주의시켜 반드시 조정의 뜻을 선포하여 유신(維新)의 효과를 다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는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정감록을 빙자한 반역사건을 무지한 백성들의 해프닝(?)으로 파악하고 황해도 관찰사에게 정상을 참작하고 주변에서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정조는 정감록과 남사고비결이 영조 임금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계속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한탄을 한다. 남사고비결은 영조 때 '윤순'이 남사고가 누구냐 묻는 영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도 실록의 기록이다.

남사고는 명종때의 천문지리에 능했던 자로 지금의 남사고비결이란 책은 그의 책이 아니라 부회한 와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사건은 남원에서 일어난 벽서사건으로 수십 명이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을 간 사건으로 정감록과 남사고비결 등이 원인이 된다. 영조는 1728년 정감록과 남사고를 물었고 이 기록이 정감록이나 남사고를 말하는 역사의 최초 기록이다. 이때의 기록에 사람이 말세에 살수 있는 곳은 산림(山林)이며  백저안답(白猪安畓) 봉목장군(蜂目將軍)  승입병도(僧入丙都) 등 압축된 언참이 나타난다.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 등은 역사서 출몰하는 최초 순간부터 위서로 낙인찍혀 있다. 책자의 모습도 책이 아닌 두루마리 한장의 간략한 책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서점에서 쉽게 만나는 남사고니 정감록이니 하는 책들은 모두가 작가들의 개인 창작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이중환의 택리지로 본 언참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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