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칼럼] 1894년 충청도 면천군의 하루
[충청 역사칼럼] 1894년 충청도 면천군의 하루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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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 이청 논설위원] 1894년 10월 면천군수로 내려온 박시순은 다음해 6월20일 전라도 임실군수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고 면천일기를 마치고 임실일기를 쓴다. 

다음이 임실일기의 첫 대목이다.
박시순은 면천군의 마지막 장면과 덕산 홍주 청양 부여를 거쳐 임실로 가는 노정도 일기속에 자세하게 기록한다. 
맑았다. 사시(巳時)에 영탑사에서 임실 부임지로 출발하였다.  내행(內行)은 여종 2명을 데리고 뒤따랐다. 책실(冊室) 이탄운(李灘雲)과 시종 문흥운(文興雲)이 수행하였다.

면천에 있을 때에 양성한 포군(砲軍) 50명이 경상(境上)에 배행하겠다고 하여 이른 아침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체되는 관리의 영군(領軍)이 접경에 나오면 보고 듣는 데 방해가 되지만 마음으로 끝내 지나치기 어려워 억지로 허락했다.   아전 유치헌(兪致憲)의 동생 유치관(兪致寬), 읍한(邑漢) 김옥성(金玉成), 관노(官奴) 등길(等吉) 및 남창(南倉) 사령(使令) 구만호(具萬戶)가 따라 와서 동구에 나와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유학 오복선(吳腹善)이 전별하러 와서 아울러 인척 김동좌(金東佐)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일해상인(日海上人)이 상경할 것이라고 하면서 박덕유(朴德裕)와 인사하고 헤어졌다.

남산점(南山店)에 이르러 겸인(傔人) 홍태산(洪太山)과 인사하고 헤어지니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모든 아전 및 관노와 사령[奴令]들이 모두 슬픔을 머금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친구 이종대(李鍾大) 및 삼공형(三公兄)이 뒤를 따랐을 뿐이다. 가게에 이르러 유학 홍관후(洪寬厚)가 전별하러 와서 신장(贐章)을 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덕산(德山) 석교점(石橋店)에 이르러 삼공형 및 포군들이 인사를 하고 갔는데 모두 서운해 하였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친구 이장헌(李章憲)도 여기에서 전별하고 돌아갔다.  
오후에 덕산군에 이르러 일행을 숙소[私次]에서 쉬도록 하였다.   곧장 관아로 들어갔는데 고을 사또 친구 조두환(曺斗煥)이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인사를 마치고 둘째 아이를 들어오게 해서 대인 동중추(同中樞) 어른을 뵙고 인사를 올렸다.  물러나서 품었던 회포를 풀었다.
사또가 술을 내오도록 하였고 이어서 점심을 내오게 하였다. 밥을 다 먹고 고별했다.   조 사또도 슬퍼하며 보냈다.
인생 헤어지고 만나는 일이 이렇게 많으니 어찌 하겠는가! 어찌 하겠는가! 숙소에서 나와 친구 김종대도 고별하고 전행(餞行)하였다.
50리 되는 곳에 이르니 더욱 감사하고 많이 서운하였다.   일행이 홍주의 교동(校洞)에 이르러 승지 김복한(金福漢)에게 들렀다. 
김복한이 술을 내어 오게 해서 권하기에 잠깐 회포를 풀고 바로 헤어졌다.

드디어 홍주 감영 성내에 이르러 선달(先達) 이관실(李觀實)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때 관찰사 이승우(李勝宇) 어른이 마침 출타하여 끝내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슬프고 한탄스럽다. 그대로 머물렀다. 오늘 60리를 걸었다.(박시순일기)

일기속에 당시 면천관아의 아전들과 사령청 급창방 소속의 아전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면천일기(면불일기) 속에는 영탑사 스님 해월이나 예산의 이남규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박시순의 세밀한 기록속에 면천 덕산 홍주등의 인물들이 그려지는 모습은 당시대를 재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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