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오가사와라 기행 ‘김옥균의 고향은 천안이다 ’
[기획] 오가사와라 기행 ‘김옥균의 고향은 천안이다 ’
  • 이 청
  • 승인 2019.09.06 18:03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는 몇년전 김옥균의 행적을 찾아 일본 오가사와를 다녀 왔다. 

오가사와라 행 배편에서 필자는 생각이 많았다. 태풍이 일본열도를 스쳐지나간 직후에 출항한 탓인지 요동이 장난이 아니었다. 바다의 출렁임 앞에서는 2천톤급 배도 일엽편주일 뿐이었다. 심한 멀미에 승객실 바닥에 누워 있자니 온갖 잡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문득 라쇼몽(羅生門)이 떠올랐다. 라쇼몽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이다. 국내에 소개된 라쇼몽은 고승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견강부회되어 있지만 본래의 면모는 간결하고 소박하다.

헤이안시대 교토의 라쇼몽(羅生門) 아래에 한 사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쫓겨나 당장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굶어죽을 입장에 처한 사내였다. 사내는 누각 위에서 죽은 시체의 머리털을 자르는 노파를 발견한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어 팔아 생업을 잇는 처지다. 사내는 노파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기모노'를 벗겨 달아난다. 그걸 팔아 며칠 연명할 참이다.

라쇼몽은 인간의 삶의 치열함을 간파한 수작이다. 글 속에 감정의 호소나 흥분은 손톱만큼도 없다. 이 건조한 소설의 스토리에 일본 승려 '에이사이(英西)'의 명언이 중첩된다. 에이사이는 세상의 어떤 존재도 생활에서는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했다. 깨달은 사람도 생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이행(移行)이다.

갑신정변 후의 김옥균의 삶은 유감이다.

푸르고 청태같던 청년 김옥균의 기상은 간데 없고 방탕과 낭비벽으로 심하게 굴절된 그의 모습은 삶의 이행(移行)이 만드는 업보라는 생각이 든다. 깨달은 사람도 밥은 먹어야 산다. 금과옥조의 경언(經言)과 풀잎에 내린 이슬만 먹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구도라는 것도 생활 속에 녹아들 때 가능한 것이다. 생활과 괴리된 깨달음은 결국 공허한 허상일 뿐이다.

1886년 7월 중순 김옥균은 도쿄 항에서 오가사오라 행 배를 탄다. 경시청에서 나온 호송관 '유끼조오'가 동행했다. 김옥균은 21일 만에(김옥균 편지에는 23일이라 되어 있다) 오가사와라에 도착한다. 김옥균이 연금된 곳은 치치시마(父島)였다. 치치시마는 '연평도'보다 조금 큰 섬이다. 오가사와라 군도 소개자료에는 17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 치치시마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섬 하하지마(母島)에는 1천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김옥균과 두산만.

김옥균과 도요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가 연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흑도와 백도가 서로 무관한 것만은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상과 민족 이기주의에 골몰한 맹목적 사상이 만나 무엇인가를 도모하고자 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필자는 바로 이 점이 청태같은 정신과 올곧은 사상의 소유자였던 김옥균의 굴절의 이유로 본다.
도요마는 임오군란 이전에 조선에 겐요사(玄洋社) 요원들을 투입, 일본정부에 첩보공작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 첩보공작에는 놀랍게도 이동인 같은 개혁적 승려도 이용된다. 한국측 연구가들은 겐요사의 갑신정변 개입을 부정하나 일본측의 많은 자료는 겐요사의 개입 사실을 보여준다. 겐요사는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지원, 공작하며 설치다가 정변의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의 정변 정객들의 후원자를 자처한다.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이와다 미다(岩田三和) 등의 일본이름을 사용하며 각고의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서 김옥균은 나태에 빠진다. 실제 시간은 9년여에 불과하지만 혈기방정한 김옥균에게는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김옥균이 나태에 빠져 재기불능으로 만든 사람이 도요마다. 도요마는 막대한 자금을 주어 김옥균이 도쿄 유라쿠조(有樂町)의 요정을 세를 내어 조선인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초대하여 음주가무와 여자로 날밤을 새우게 만든다.
김옥균의 유라쿠조 생활은 풍성했다. 술과 담론 그리고 춤과 여자들에 빠져 지내는 시간은 춥고 외롭던 망명객에는 달콤한 독배(?)였다. 김옥균에게 한몸으로 천하를 이끈다(一身引天下)라는 호연한 글씨를 써주기도 한 도요마는 이때 본이방 슈에이와 김옥균을 만나게 자리를 놔준다. 필자의 판단은 도요마가 김옥균에게 미친 영향 중 가장 잘한 일이 이 일로 생각 된다.
일본측의 한 자료는 김옥균과 슈에이를 처음 소개한 사람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喩吉)라 말한다. 그러나 도요마와 후쿠자와의 관계를 알면 별다른 의미가 아니다. 후쿠자와가 아이디어를 내면 도요마가 행동하는 관계의 두 사람은 일심동체(?)였다. 구한말 일본정부를 대신하여 조선을 향한 정치커넥션의 배후의 거물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정치커넥션이 백일하에 노출되자 김옥균이 수세에 몰린다. 박영효와의 불화도 극심했다. 박영효는 타락해 가는 김옥균을 아타까워하며 증오했다. 이 와중에 정변망명객들을 송환하라는 조선의 요구와 고종이 직접 보낸 자객들의 움직임은 일본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망명객들을 바라보는 국제적 시선도 부담이었다. 1886년 7월 21일 전격 단행된 김옥균의 오가사와라 연금의 배경이다.
일본정부는 후쿠자와와 도요마에게 압력을 넣어 김옥균의 지원 활동을 중단케 했고 그 시기 실제로 그들의 지원이 중단된다. 오가사와라에 도착한 김옥균은 그야말로 무일푼에 후원자 한명 없는 신세였다. 김옥균의 인생 중 가장 춥고 고통스런 시절이 그때였다.

병아리 십여 마리를 얻어 길렀더니(養得鷄雛十許頭)
틈만 나면 서로가 다투는구나(時來挑鬪沒因由)
몇번인가 홰를 치다가 멈춰서서(數回還停立)
서로가 바라보다 문득 그치더라(脈脈相看便罷休).

이 글씨는 유길준이 김옥균의 편지를 받고 쓴 글씨다. 병아리를 얻어 기른 궁핍함과 함께 아직도 세상의 시비곡절을 주시하는 시선이 살아있다.

그곳을 본인방 슈에이가 찾아온 것은 사건이다.
슈에이는 처음 김옥균균과의 만남을 잊지 못했다. 바둑세상에서 최고를 자부하던 자신에게 바둑의 본질을 묻던 사람이 김옥균이다. 슈에이는 김옥균의 깊은 학식과 솔직 담백한 성격을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슈에이가 존경한 것은 김옥균의 세상의 덕목의 제단에 목숨을 던진 용기였다. 타락한 김옥균의 현실은 문제가 아니었다. 슈에이가 배편으로 왕복 44일이 걸리는 절해고도로 김옥균을 찾아온 이유가 그랬다.
슈에이는 김옥균을 나의 스승이자 친구라 말한다. 김옥균도 그렇게 화답했다.
희대의 간웅 도요마의 음습한 그늘 아래서 김옥균과 슈에이의 에피소드의 꽃이 핀 것은 기적이다.

김옥균의 자식들.

김옥균은 소설과 드라마 등 대중의 환상 속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갑신정변과 일본망명 그리고 자객에게 살해 당한 극적인 삶의 스토리가 대중성을 먹고 사는 필자들과 저널의 식탐의 대상인 탓일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본래면모에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토록 김옥균을 팔아먹으면서도 그의 후손의 삶이나 내력 등은 관심이 아니다. 누군가 애써 연구하고 발굴을 해 놓으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팔아먹기 바쁜 그들에게 이런 질문은 가당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김옥균에게 후손은 있었을까. 후손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의외로 김옥균은 열심히 자식농사를 지은 자료가 많다. 이곳에서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일단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 본다.
1) 유씨에게서 딸이 있었다.
2) 일본인 '기시'라는 여자에게서 '야마토'라는 아들을 낳았다.
3.4) 후카이도의 '오다쿠'에 유배 생활 중 기녀와 동거를 했고 그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기녀의 열살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였다.
5) 도쿄 '유락정'에 살 때 또 다른 기녀사이에 딸을 낳았다.
6) 오가사와라에서 양자로 삼은 '와다'는 김옥균을 아버지라 불렀다.
7) 김영진이란 김옥균의 정식 양자가 아산 영인면에 김옥균의 묘를 조성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을 하면서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남자들은 대부분 교수형이나 자살을 했고 어머니와 누이 등도 그런 식이었다. 부인 유씨와 여섯살 난 딸은 옥천관아의 노비로 노역을 살았다. 딸아이는 유씨를 한동안 따라다니다 성년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김옥균은 일본 생활에서 대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안정되지 못한 생활 탓에 만나는 여자들도 대부분 기녀 또는 미망인 등이다. 김옥균의 아들임을 자처한 사람은 '야마토'다. 그는 됴요마 미쓰루의 겐요사의 사원으로 살면서 어느 시점부터 행방불명된다.
필자는 김옥균의 후손을 살펴보면서 김옥균이 훗카이도에서 함께 살았던 여인의 아들을 주목했다. 김옥균이 이 여자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는 열살 난 아들이 있었다. 1886년의 일이니 그 사내아이는 1876년 생이다.
김옥균의 한국인 부인 유씨는 1900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생활이 폈다. 일본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때 일본에서 한 젊은이가 그녀를 찾아온다. 유씨는 그 젊은이의 손을 잡고 울면서 '니가 김옥균의 아들이다'를 공표한다. 김영진(金英鎭 1876-1944)의 출현이다. 김영진은 일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아산군수 보령군수 금산군수 등을 거쳐 일본 참의원 의원으로 승승장구하다 친일판 사전에까지 수록된다.
김옥균의 묘가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조성된 것도 모두 김영진의 공이다. 필자는 수개월전 한 경매장에서 김영진의 친필 족자를 보고 놀랐다. 그 내용이 아버지 김옥균에 대한 것이었다.

와다(和田延次郞) 김옥균의 주검을 지키다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온 김옥균은 절망스러웠다. 포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소(島所)에서 배정해준 움막집에 기거하면서 밥까지 손수 해먹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스럽게 일본말에 능통했던 김옥균은 순박한 섬 사람들의 인심을 얻는 데 성공하여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김옥균의 움막을 찾아오는 소년이 있었다. 김옥균의 거처에서 가까운 곳에 살던 와다엔지로(和田延次郞)는 14살로 총명하고 용기가 있는 소년이었다. 김옥균은 그 아이에게 심심파적으로 글을 가르쳤다. 와다에게 글을 가르치자 섬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식들도 맡기기를 원했다.

김옥균의 서당 개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칠팔 명 정도였다. 김옥균은 이 아이들에게 한문과 바둑을 가르쳤다. 와다는 김옥균을 한국말로 아버지(父)라 불렀다. 김옥균이 그렇게 부르라 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와다의 총명함을 간파하고 양부를 자청했다. 이 때쯤 본인방 슈에이가 섬에 왔다. 김옥균은 꿈을 꾸는 듯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무려 92일간을 섬에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 와다는 김옥균과 슈에이의 수발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통해 세상은 넓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슈에이가 떠난다. 슈에이가 떠나던 날 김옥균은 작은 전마선을 빌려 타고 슈에이를 태우고 떠나는 여객선을 30리 정도를 좇아가며 배웅을 했다고 했다. 김옥균은 훗날 여러 사람에게 준 편지를 통해 슈에이와의 이별이 참으로 아팠다고 토로했다.


김옥균의 정신과 실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친필.

김옥균은 이 섬에서 18개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후카이도로 거처가 옮겨진다.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이 김옥균을 찾아 전 일본을 뒤지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의 대응이었다. 김옥균은 와다와 헤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이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옥균이 후카이도에서 돌아온 1890년 동경의 한 행사장에서 김옥균과 와다는 다시 조우한다. 총명하고 용기까지 있던 섬 소년 와다 겐지로가 섬 생활을 청산(?)하고 큰 세상으로 나왔다가 김옥균을 상봉한 것이다. 그날부터 와다는 김옥균의 수행비서가 된다.

와다는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살해된 현장에도 있었다. 김옥균의 시신을 일본으로 옮기려는 노력을 무진 한 사람도 와다였다. 그러나 와다의 능력은 거기까지였다. 와다는 김옥균의 소장품 몇 점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유품이 일본과 아산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김옥균의 중국행과 죽음의 배경의 뒷담화는 생략해도 될 것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와다 겐지로는 김옥균 사후에도 그의 양자를 자처하며 일본내에 불기 시작한 김옥균 열풍의 중심에 선다. 지금도 김옥균 마니아들이 모여 연구회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일본이다.

필자는 김옥균을 바둑을 사랑했던 마니아로 생각한다. 김옥균은 바둑을 좋아한 차원을 떠나 바둑의 역사와 철학에 많은 관심과 나름의 연구가 있었다. 김옥균은 '조선의 바둑은 천축(티벳)에서 유례한 것이고 조선에만 있다는 순장(?)바둑은 영조후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최남선도 하지 못한 주장이다. 김옥균은 조선의 순장식 바둑의 시발을 극단적인 노름 풍토가 낳은 산물이라 했다. 이 발언은 순장식 바둑에 대한 이 땅의 가장 책임 있는 인물의 발언이기도 하다.

오늘날 김옥균은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구한말의 혼돈의 시대를 살아낸 정치가로 혁명의 선봉을 자임했던 탓에 칭찬과 질책을 한몸에 받는 것은 그의 업보다. 필자는 정치가 김옥균을 발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입장도 되지 못한다. 다만 이 말은 하고 싶다. 도무지 나라꼴이 말이 아니던 구한말, 죽은 시체나 다름없던 조선의 몸통 속에 두 손을 쑤셔넣고 심장을 마사지하며 멈추기 직전의 조선을 살려보고자 했던 열혈남아가 바로 김옥균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와 함께 당시대에 세상에서 바둑을 가장 사랑했던 지식인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필자는 얼마전 충청도 아산시 영인면의 김옥균의 무덤을 찾았다. 쓸쓸하고 허전한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와다'가 전해준 김옥균의 유품을 받아 김영진이 만든 묘다. 그리고 김옥균의 정실부인 유씨가 죽자 이 무덤에 합장함으로써 진정한 김옥균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비문은 박영효의 글씨로 되어 있다. 김옥균의 무덤은 영인면에 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천안이다. 김옥균은 본인의 입으로 나의 고향은 천안이다 분명히 말한바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디리 2022-01-13 10:29:15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잘쓰셨네

ㅇㅇ 2021-07-30 14:23:16
재밌는 기사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