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23회 4장 풍운의 그림자 (2)
[연재소설 청룡도] 23회 4장 풍운의 그림자 (2)
  • 이 은호 작
  • 승인 2019.08.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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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4년(1800) 6월 28일이 전하는 조선실록의 하루는 숨가쁘다.
정조는 보름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정조는 이날도 아침부터 내의원 의원들로부터 진맥을 받고 자신의 병증을 상의를 한다.
정조는 스스로 한의학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인물답게 의원들에게 ‘가감내탁산'을 지어 오게 하여 복용을 하고 정무에 나선다.

정조의 업무는 승지 한치응을 김조순으로 바꾼 것이 전부다.
이날 하루 동안 정조의 지근에 있었던 사람들은 의관들과 승지 김조순, 좌의정 심환지, 정순왕후 김씨. 그리고 이서구 등이다.
이날 승지로 임명된 김조순은 정조의 총신으로 세자의 장인으로 낙점되어 있었다.
지근에는 심환지가 있다. 심환지는 지근에서 정조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내의원을 재촉하여 약을 청해오기도 한다. 정조의 병증이 생각보다 심각했다는 반증이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이날 운명한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운명을 지켜보고 심환지가 방문 밖에서 울며 정순왕후의 독면(獨面)을 타박하고 있다. 이서구가 정조의 운명을 확인하고 정조의 옷가지를 들고 나가 왕의 죽음을 알린다.
천하성이 울리고 대궐문이 닫힌다. 각 군문이 위수지역을 경계한다.

논객들은 이날의 실록의 기록을 보고 온갖 상상을 한다. 심환지와 정순왕후가 정조의 반대파로 이들에 의해 정조가 독살되었을 거라는 추측도 이곳에서 나온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정조와 정순왕후를 철천지원수로 그리며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부단하게 괴롭히는 악녀로 그린다.

그러나 사실(事實)의 역사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와는 전혀 다르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절대통치를 하던 24년의 재위 기간에도 대비의 권위를 전혀 잃지 않고 있다.

벽파의 노대신 심환지도 정조의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벽파이면서도 정조와 죽이 맞던 이서구도 옆에 있다. 이서구는 간혹 바른말로 정조를 불쾌하게 하기도 한다.
이 대목은 정조 24년 당시의 정치 지형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벽파, 시파라는 당파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니 시파니 하는 당파는 이미 정조에게 완전 투항을 한 상황이었다. 정조의 부단한 정지 작업으로 당파는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정조는 이미 죽기 전 10년전부터는 절대권력자였다.
조선에서는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정조는 조선의 군왕이자 모든 신하의 스승이며 만백성의 아버지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산림(山林)의 영수였다. 그런 정조에게 대항할 정치 세력은 없었다.

정조는 왕도정치의 총아이자 패권자였다. 정조는 조선의 모든 일을 간섭했고 주재했다.
군왕만의 친위군을 양성했고 전대미문의 화성 신도시를 건설했다. 어머니 홍씨의 환갑잔치로 군중 10만 명을 모아 보름간 먹고 마시게 하는 통큰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조는 문인들의 글쓰기까지 간섭을 했다.

규장각 안에 있는 책들 중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책들을 색출해서 분서(焚書)도 했다.
사실적이고 감상적인 글을 쓰는 박지원 이옥 박제가 김려 등 독보적 문인들을 개망신 주고 내쫒기도 했다.
함경도 지방의 상무정신을 살려야 한다며 함경도 곳곳에 퍼져 나가던 서당을 폐쇄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감시하는 등 함경도 지역의 공부에 대한 기본적 욕구를 막기도 했다.

자칭 타고난 시인이자 평론가인 정조는 당시(唐詩) 백 편을 뽑아 출판하고 수록된 시편을 비판하는 문인들의 지적을 못 견뎌 한다. 열불이 났던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 박제가 이옥 등의 글을 보고 이런 평을 한다.

- 근래 문풍이 변하여 문장가들이 시서육례에 근본을 두지 않고 머리를 박고 마음을 써가면서 패관소품지서를 짓고 병려지작이라며 자위하는 것은 사람이 혼수상태에서 헛소리를 내지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잠꼬대를 써놓고 스스로 기교를 다했다고 하고 있다. (홍제전서)
참으로 위험한 말이다. 필자는 만권(?) 독서를 인생의 꿈으로 알고 실천하고 있다.
하여 조선의 수많은 문인들 중 ‘문인 중의 문인’으로 박지원을 꼽는다. 실제로 박지원의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 그런 박지원의 글을 광인이 내지르는 헛소리라 평가하는 정조다.

박지원은 장마철이면 수일을 굶곤 했다 기록한 적이 있다.
이옥도 그런 경우다. 정조의 탄압이 가져온 어두운 일면이다. 이옥의 시가 [청룡도] 13회에 두 편 나온다. 참고를 하시라.
어쨌든 일국의 절대 군주가 나라 안의 모든 문인들을 향해 글쓰기의 방향까지 간섭하고 분서갱유에 유배조치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은 공포정치에 다름 아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동시대 검서관 유득공이 순조 1년에 중국에 가 '주자본의'라는 책을 구하고자 하나 못 구했을 정도로 중국은 이미 주자학을 떨궈버린 지 오래였다. 정조는 중국도 버린 주자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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