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시리즈]면천읍성과 연암 박지원
[충청 역사 시리즈]면천읍성과 연암 박지원
  • 이청 충남역사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19.09.1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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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미공개 간찰 발굴 공개.

면천은 조선시대 329개 지방 행정 기구 중 80위권안에 드는 유력군으로 관아 시설이나 예산 등도 튼실 했다. 그러나 면천향교지에 전하는 역대 군수 명단은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조선실록에 등장하는 10여명의 면천군수를 합해도 턱 없이 부실(?)하다. 다행스럽게 승정원일기에 대량의 역대 면천군수가 기록되어 큰 기쁨을 준다.

승정원일기는 검색이 가능하나 국역이 되어 있지 않은 탓에 한문에 능통하지 않으면 읽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승정원일기에 면천 군수가 최초로 등장하는 1626년 인조4년 '강선여' 다. 그로부터 1797년 6월 26일 박지원까지 대략 70명에 이른다.
이들 중 훗날 정승에 오른 '김이복', '김종수', '유언제' 등 유명인도 보인다.

박지원은 1797년 6월26일 희정당에서 정조의 특명을 받고 하직 인사를 한다. 박지원은 한양 계동집에서 여장을 준비하여 과천 평택을 거쳐 면천에 도착한다. 도착한 첫날 박지원은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성문을 닫는 의식이 영남고을보다 장중하고 절도가 있다 기록한다. 부임한 즉시 박지원에게 부여된 임무는 충청수군의 합동 훈련이다.

박지원은 면천군수이자 수군 장수로 두척의 면천 전투선에 백여명의 수군을 태우고 안흥 앞바다를 거쳐 오천 수영으로 전개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이 끝난 후 박지원은 '이방익의 일'이란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린다. 이방익은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을 거쳐 수년만에 돌아온 어부로 그의 경험을 자료로 남기는 일이 박지원에게 떨어진 것이다. 박지원의 중요 임무는 당시 충청도를 발호하는 서학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1795년 청양 금정역장으로 내려와 있던 정약용의 기지로 체포한 이존창(1752-1801)을 대면한 후 그를 설득한다. 그리고 사형이 내려진 이존창의 사면을 정조에게 청하여 일시 방면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박지원은 관찰사 한용화와 갈등으로 사표를 내고 한양으로 무단 상경하기도 한다. 이 보고를 받은 정조는 의금부 관원을 한강으로 보내 박지원의 도강을 막고 돌려 보내기도 했다.

박지원은 양제저수지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향교앞에 버려진 저수지를 수리하여 물을 가두고 가운데에 작은 초가 정자를 짓고 나무다리를 향교쪽으로 내고는 늙은이가 정자를 짓자 반기는 비가 내린다는 중국 고사를 들어 '취옹희우우사정'이라 이름을 짓기도 한다. 박지원은 '한용화' 다음으로 내려온 관찰사 '이태영'에게 정자의 현판을 청하여 받기도 한다.

박지원은 면천에서 <칠사고>, <면양잡록> 등 여러권의 책을 쓴다. 당시 평균 1년을 채우기 힘들던 군수직을 37개월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쓰는 박지원을 옹호한 정조의 후원이었다. 박지원은 면천 군수를 하며 지역의 숙원 사업 하나를 해결한다. 그것은 면천에 계속 부과돼온 전함건조의 혁파였다.

당시 면천은 내포의 유력군으로 손꼽혀 전함과 화포제작의 과업이 계속 되어 인조, 숙종, 영조 시대를 내려오며 면천군의 재정에 고충을 주고 있었다.
박지원은 1800년 6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충청도 관원들을 대표하여 고유문을 짓고 8월 강원도 양양부사로 승진하며 면천을 떠난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박지원에게 있어 면천은 제2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박지원은 면천에서 생활하며 많은 책을 썼고 '서얼철폐', '노비혁파' 등을 조정에 건의문으로 내기도 한다. 박지원은 양양에서 수개월만에 체직되어 한양 집으로 돌아와 수년만에 죽음을 맞는다.

박지원선생 간찰 2편 발굴.

필자는 10년전 한 고서상에게 박지원의 간찰 7통을 구입 했다. 처음 공개 하는 내용이다.

연일 이 더위에 어떻게 지내는지 그립고 궁금하오. 나는 이곳에서 몸이 좋지 않아 걱정이지만 그립던 차에 편지를 받고 보니 위로도 되고 가까운 시간에는 내려오지 못한다니 섭섭하기도 하네. 연전에 충청감영에 간 것은 몸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부득이 아픔을 참고 간 것이고 돌아와 통증이 더해 혼났다네. 관아의 일이라는 것이 온갖 잡무로 쉴 틈이 없어 괴롭지만 공무를 소홀이 할 수 없기에 관 둘 수도 쉴 수도 없으니 걱정일세. 나는 책읽기가 취미이고 바둑 등은 그리 마음에 두지는 않았지만 이 더위를 견딜만한 것으로 그만한 것도 없기에 향리의 고수를 불러 그럭저럭 시간을 보네고 있으이. 편지에 주자의 일(주자가 남강에서 고을 원을 할 때 제자를 지도했다는 고사를 말하는 듯)을 운운 하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고 웃었네. 지금 이곳 충청도에 그런 목민관은 없다네. 가까운 날에 내려온다니 다음 편지에 날자를 밝혀주면 기쁘겠네. 이만 줄이네. -면천관아에서.

(近日苦熱. 啓處如何 溯又懸 余此中病憂一樣 懸企方切 書至雖慰 近日不果來 良以爲悵 向日之金營 非病少愈 乃忍苦而作耳. 旣歸免添病 衙堂長直 雜事有坌㗒之役 則苦役 然而公簿不得不强意繙繹 不失其密案 不息不退兩難也. 余讀書之好奕碁之嗜 泊然無婴精 而消遣之資實無好道故理耳. 鄕碁來往 憒粗遣 案之朱子所行語云云 可可撲掌. 今日湖中之間 未必有其人邇 不往來日 更因書及之爲佳. 餘不具. 沔衙之書.)
이청 번역.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바둑을 한차례 언급을 했다. 그의 아들 박종채는 자신의 아버지가 바둑을 둘 줄 알았으나 잘 두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 박지원이 바둑을 이해하고 즐기기도 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수삼도 글에서 박지원이 연행길에서 중국인들과 바둑을 두며 해학을 보여준 대목을 언급 한 적도 있다.

그러던 1980년대 발굴된 박지원의 간찰에서 집에 있는 바둑책을 찾아 근무처로 내려 보내라는 내용이 등장 박지원이 애기가임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위의 간찰은 박지원이 스스로 지역의 바둑인을 불러 대국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다른 간찰 한통은 이렇다.

기다리던 답장을 신부름하는 사람에게 받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냅니다, 꽃샘 추위에 편안하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고질병인 치질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날씨가 좋지않은 것은 이곳도 매한가지입니다. 이곳은 두견주로 이름이 난 고을, 진달래꽃 꺽을(술을 담그려)날은 기다리며 나는 바둑으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그대가 볼 때 이곳은 바닷가의 궁벽진 곳이고 땅은 얼어 녹지 않고 밤이면 돌덩이 같은 얼음이 얼고 아침이면 손이 저릴 정도이지요.
지난번 말한 세곡으로 말하면 답이 없어오. 빌려준 곡식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곡식도 상품을 요구하면서 독촉이 엄혹하니 백성들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독촉을 하지 않으면 관장들이 곤경에 처하니 진실로 관장들의 고민은 세곡이지요.
돌아가는 신부름꾼에게 몇가지 물품을 함께 우송하니, 수령 여부를 다음 인편에 알려주시요.
이만 줄입니다.

(方以未承 覆爲鬱 郵人惠書 就審春寒 爲幸良至 余痔疾 近日略得減 風日之不好 此中亦然 杜花之間 尙邇杏漠 此所杜酒有名邑 而折待杜花 手談之克節 君以見 況絶漢窮溟 凍土未盡
夜中爲石氷 朝冷指痛 傳書之納穀 不答 借穀不可促納 其入穀又佳穀不擇捧 督太過 民生苦穿空 不督 官卽困亂 眞與官苦 納穀也. 歸郵人 送負物故去矣 未知果傳至 否 次郵書言之爾 餘不具.) 이청번역.

금영은 충청도 감영을 말한다. 박지원이 면천 군수시절 충청감영은 공주에 있었고 박지원 재임기간 관찰사는 한용화 이태영 김기영이었다. 박지원은 이들 관찰사중 이태영 김기영과 상당한 친교가 있었다. 박지원은 이때 몸에 병이 있었던 듯하다. 면천군수를 사직한 후 불과 5년후에 사망한 것을 보아 그렇다.

이 간찰의 수납자는 미상이다. 면천에 박지원의 지인들이 무상으로 드나들어 그들중 한명으로 추정된다. 다만 군기를 의미하는 향기(鄕碁)라는 용어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바둑만한 것이 없다(박지원의 다른 간찰에도 등장)는 박지원의 바둑관이 흥미롭다. 그리고 충청도의 수많은 목민관중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은 없다는 의미의 발언등이 주목된다. 박지원은 이때 호론 낙론의 대립으로 남당 한원진을 외면하는 충청도 목민관들의 행태를 보고 실망을 한 적이 있어 이 당시의 소회로 여겨진다.

지금 면천읍성이 복원된다.

읍성안에 연암관을 건설하고 읍성 복원 주 도로를 연암로로 명명 하겠다는 당진시의 방침이 씁쓸하다. 박지원이 면천 군수로 3년 남짓 근무한 것은 맞지만 박지원을 기리는 사업이 함양군외 여러 곳이 있는데 연암교육관을 지어 박지원을 기린다는 것은 중복이고 면천읍성 복원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암교육관을 짓는다면 할말은 없다 하여 참 교육자 박지원의 면모를 첨가 한다.

1769년 34세였던 박지원은 16세 어린 제자 이서구(1754-1725)와 마주 앉아 있었다. 이서구는 양반가문의 자식으로 박지원의 집과 대문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운 인연으로 아동기부터 인연이 있었다. 박지원은 총명하고 부침성 있는 이서구를 수시로 불러 글을 가르쳤고 이서구는 즐겁게 이를 받아들였다. 이 날 이서구는 바깥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박지원에게 했다.

"제가 글을 배우기를 수 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묻기를 경전에 있는 것이냐 합니다. 제가 아닙니다 제가 하는 말입니다. 하면 마구 화를 냅니다. 스승님 이게 잘못된 겁니까?"
이서구는 왜냐고 묻는 사람이었다. 박지원은 왜냐고 묻지 못하는 사람은 앵무새와 다름 없음을 설파하는 사람이었다. 박지원은 이서구의 이 질문을 받고 기상천외한 답변을 한다. 박지원은 두손을 이마위에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번 절 한 후 무릅을 꿇고 말한다.(不接撰手加額三拜跪曰)

"과연 그말이 맞다. (너는) 끊어진 학문을 이을만하다(此言甚正 可與絶學)"
출전이 박지원의 저작 '녹천관집서'이니 팩트라 할 수 있다. 어린 제자의 이 쓸모(?) 있는 질문에 무릅을 꿇고 절까지 하며 격려하는 박지원의 모습은 충격을 넘어 전률이 일어날 정도다. 박지원은 이 때보다 4년전에 18살 박제가가 자신을 찾아 와 박제가임을 밝히자 마당으로 뛰어 내려와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를 하고는 손수 쌀을 씻어 밥을 해 먹이고 밤을 새워가며 자신이 지은 글을 보여주며 학문의 길로 안내를 했었다.

박지원은 이서구와 박제가에게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가르쳤다. 박지원은 법고는 옛 흔적에만 머무르고 창신은 괴변만 늘어 놓는다(法古者病泥跡創新者患不經)며 법고와 창신의 균형이 세상의 잣대가 돼야 한다고 설파한다.

박지원은 이서구 박제가보다 열살이 어린 서유본(1762-1822)을 지도하며 비슷한 것은 가짜(似己非眞)이니 새로운 것을 창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은 온전히 갖아야 한다(新字雖難創我臆宜書)고 지도한다. 박지원은 한 세대 차이인 서유본을 한강변의 한 집에서 삼일밤을 지샌 후 서유본에게 다짐의 글을 준다.

"(그대가) 젊은 날 노력을 한다면 앞날이 창창 하리라(願者努壯年 全門正東閜)"
박지원은 사승관계로 법을 내리는 승가(불가)의 선적방식으로 제자들과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는 교육방식을 보여준다. 스승에게 이런 방식의 지도를 받고 마음의 울림이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서구 박제가 서유본은 스승의 바램대로 18세기를 풍미한다.

'법고창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진보니 보수니 하며 세상을 들썩이는 모습위에 박지원선생의 이 말씀이 어른거린다.
면천읍성 복원과 연암교육관은 곧 완성될 듯 하다. 천년 고성 면천읍성의 복원과 그곳을 거쳐갔던 연암 박지원의 진면모가 들어나는 사업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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