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가야산 가야사 미스터리
[기획] 가야산 가야사 미스터리
  • 이 청
  • 승인 2019.09.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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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양사인가 가야사인가. 지금 발굴중인 가야사 범위를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충남투데이 / 이청 논설위원] 가야산 일원에는 필자 조사로 60개의 사찰명이(본보 가야산 불교 흥망사) 파악 된다. 가야산에 99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말이 틀린말이 아닌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가야산의 중심 사찰로 여겨지는 가야사는 조선시대 경신 대기근 때까지 유력 사찰로 존재했던 것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현종 10년 가야사에 대한 과도한 종이 부역으로 승려들이 모두 도망을 갔고 숙종 중기에는 가야사의 유일한 재산인 사전(寺田) 수만평을 몰수 당한 후부터 가야사는 급격하게 폐사의 길로 접어 들었던 점도 지난호에 알아 보았다.

필자는 의문이 든다. 가야사(伽倻寺)라는 사명에 대한 의문이다. 가야사의 기록은 고려사에 등장한다. 1177년 망이등 도적들이 가야사에 은거했다는 기록이후 가야사는 여러 기록에 점층적으로 등장한다. 가야사는 가야산안에서 가장 유력한 사찰로 여겨지는 이유는 산명을 사찰명으로 사용했고 전해지는 사지(寺地)의 규모다.

가야사는 소위 명당 수융결지(水融結地)로 남연군묘 조성과 함께 전설의 사찰이 되어 폐허로 남아 있다. 이 가야사지를 2012년부터 19년까지 7차례 시발굴 조사가 진행 가야사의 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발굴자는 충청역사문화원 금강문화연구원 동방문화연구원등으로 발굴 결과 통일신라에서 조선 (2차) 고려에서 조선(2차3차4차) 고려(5차) 고려 조선 (6차)로 나타났다.

이 발굴 조사에서 의미를 둘 만한 것은 5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 8두 금동불두 청동접시 청자 토기등이 고려 조선시대 토층에 교란되어 나타났다. 이중에서 용문양 치미 기초를 다진 회를 사용한 공법등이 들어나 7차 발굴을 이끈 연구자는 필자에게 한반도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고급 자재를 사용한 최고의 재료와 공법이 사용된 사찰로 파악된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다만 사찰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점은 조금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시발굴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필자는 7차례의 발굴조사에서 매번 나온 명문 기와와 명문 전돌에 주목한다.

1차. 명문전돌 가양갑(加良岬) 명문기와 가양갑사(加良岬寺)

2차. 명문기와 四月三日之加良岬寺.

3차. 4차 6차.

명문기와 四月三日之加良岬寺.

7차.

명문기와 加良岬寺. 명문기와 통훈대부(通訓大夫)

가양갑사라는 명문 기와가 발굴 조사마다 나오는 이유는 가야사지에 있던 절의 이름이 가야갑사라는 의미다. 가양은 덕음무량(德音无良) 곧 부처님의 소리다. 갑(岬)은 곶(串)으로 산과 산 사이 깊은 계곡을 의미한 것으로 갑사 도갑사 불갑사등에서 쓰여진 한자다. 그런데도 기야사가 각종 문헌에 지속되는 이유는 궁금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자.

해미(海美)의 가야산 : 상왕산(象王山)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동학(洞壑)은 곧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서쪽에 수렴동(水簾洞)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講堂洞)ㆍ무릉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

이긍익은 가야사를 직접 방문했다. 이긍익은 가야사 계곡에서 어떤 꿈같은 이야기를 한다. 가야산 계곡에 상왕의 궁궐이 있었다는 식의 발언이 그렇다.

가양갑사가 가야사로 불린 이유를 순한 언어를 변하는 언어습관으로 보고 가양갑사가 가야사로 변했다는 식의 해석은 아전인수다.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긍익의 가야사 이후 수많은 기록에 가야사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찰의 이름을 가양갑사로 정해 놓고 표기를 가야사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산은 여러 차례 중건 건축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도 발굴되는 기와명은 가양갑사를 유지한다. 기록으로 가야사를 가장 정치하게 묘사한 것이 이의숙(영조시대 사람)이 기록한 ‘이재집’이다.

-석문담에서 4리쯤 가야사가 있다. 노송이 푸르고 작은 오솔길 좌측으로 부도(浮圖 屠가 아닌 圖)가 있다. 산문의 루각 앞에 또 다른 부도와 작은 석탑이 있다. 법당안에는 큰철불이 북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높이가 2장이고 몸체가 장대하다.

절 뒤로 73 돌계단을 오르면 계단마다 석탑이 놓여 있고 높이가 3백장(20미터) 정도다. 층마다 작은 부처들이 놓여 있고 탑은 청동 고리를 둘러 놓았고 철로 풍경을 달아 놓았는데 비바람에도 크게 마모되지 않았다. 탑에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깊은 계곡이 아득하다.

이의숙은 18세기 윤봉구 윤봉오 형제가 덕산에 살 때 상산삼매를 남긴 이철환과 비슷한 시기다. 이의숙과 이철환의 기록은 대동소이 하다. 이 당시 가야사는 쇠락의 끝에 와 있는 모습이다. 가야사는 폐허가 됐지만 지금도 찾아 보면 가야사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게 된다. 해미에 사는 박준상 소장 팔주령이 그것이다.

이 팔주령은 상가리에서 출토 됐다고 하는데 보물급 문화재로 손색이 없다.

가양갑사로 명명하고 가야사로 표기하고 읽는 이중 언어문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야산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전기 가야와 맥이 다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실재로 1986년 경남 김해시 주최 가야사 세미나에 참석했던 일본 명치대학 역사학과 오스카 교수는 후기가야(경상남도)를 말하려면 전기 가야를 말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적도 있다. 오스카교수는 한반도에서 전기 가야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산 가야사지에 대한 연구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우선 대규모 발굴 사업을 통해 가야사지에 대한 좀더 많은 정보가 나와야 할 듯 하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다.

글 이청.

상가리에 대하여.

가야사지를 품고 있는 마을이 상가리(上伽里)다. 덕산에 살던 윤봉오의 기록에 상가사(上伽寺)라는 기록이 보인다. 가야사를 상가사로 표기한 듯 하다. 상가리를 불교적으로 설명하는 분이 있다. 원효사 해월스님이다. 해월스님은 원광대 한의학과 출신으로 출가하여 공주 원효사 주지로 왕성한 지역 불교 활동과 동학과 관련 많은 연구와 가야산과 불교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해월스님은 상가는 승가의 음역으로 옛날 많은 승려들이 가야동에 있었던 흔적이라는 의견을 냈다. 조만간 가야산 덕산온천 역사 세미나에서 스님의 의견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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