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역사 시리즈 ] 가야산 불교의 흥망사
[예산역사 시리즈 ] 가야산 불교의 흥망사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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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이청 논설위원] 백화쟁명 하던 불교 문화 뒤 살려야.
  가야산은 상왕산이다. 가야(伽倻)는 인도어로 코끼리를 의미하고 상왕(象王)은 코끼리의 왕의 의미니 가야는 곧 상왕이고 상왕은 인도 불교의 덕목이다.

가야산 자락은 예로부터 수많은 사찰이 가야산의 주능선을 따라 동서편으로 분포했으나 지금은 서쪽의 몇 개 사찰을 빼고는 동사면 사찰이 대부분 폐사된 실정이다.

가야산에는 필자 확인으로 사지와 사명이 확인된 사찰이 60여개로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등에 비해 수 분의 일에 불과한 가야산 자락에 이토록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것은 가야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말해준다.

가야산에서 중심 사찰인 가야사는 상왕산 동북쪽에서 유입되는 골짜기의 상류에 위치한 곳으로 폐사지 규모로 보아 엄청난 규모의 대가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사는 금석문 자료에 898년 신라 효공왕 2년 ‘현휘선사’의 기록과 ‘이엄(870-936)’ ‘윤다(864-945)선사’의 수계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가야사는 중국 불교 13종의 하나인 법상종의 종찰이었다.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일정한 사세를 유지해 오다 조선 현종때인 1623년 가야사에 부과되는 가혹한 종이 공출에 견디다 못해 가야사 승려들이 모두 도망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덕산 현감은 가야사에 엄청난 종이 부역을 가했고 덕산지역의 종이조합인 ‘금란계’와의 충돌로 가야사는 급격하게 쇠락한다.

이 사건에 한 술 더한 것이 숙종이 가야사의 전답 7결(3만평에서 10만평)을 몰 수 함으로 생도지망을 잃어버린 가야사는 몰락을 넘어 폐허로 남게 된다. 그래도 가야사는 가야산 자락의 모든 사찰의 모태로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하다. 다음은 가야산 자락에 있던 사찰들이다.
 
가랑압/가랑압사/가야사.

문수사, 개심사, 일락사, 수덕사, 보원사, 수도사, 안흥사, 영봉사, 청송사, 서림사, 보현사,심존사, 수암사, 용연사, 운암사(동국여지승람), 용봉사, 능인암 용암, 정수암, 일조암(여지도서), 묘암사, 영사암, 북암, 적조암, 대승사, 양수암, 향월암, 벽력암, 백암(이철환), 초암 (조극선), 봉명사, 일명사(이은창), 용대암, 용자암, 봉두암, 취대암(호산록), 천장사, 보덕사, 정헤암, 관음암, 송덕암, 미륵사, 법륜사, 원효암, 인암.  가야사에는 장엄 화려했던 오층 금탑이 있었다. 덕산현지와 이의숙등 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을 토대로 추측성 글들이 난무하지만 불교미술사 학자인 조유석은 금탑을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평가를 한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세밀한 연구와 자료 찾기가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가야사의 몰락은 조선 후기 불교에 가해지던 가혹한 공물징수와 사찰 소유의 재산을 강탈한 관의 무자비한 탄압과 이 정책을 이용하여 사찰 재산을 침탈한 양반 사대부들의 횡포도 기여한다.

봉명사를 밀어 버리고 그 위에 재실을 지은 이의배 재실이나 서림사터위에 지어진 ‘희암서원’ 그리고 남연군 묘지와 예산의 문화재인 ‘정대영’ 가옥도 절터위에 지어진 것이 확인된다.
 
‘빈대절터(空臺寺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가야산에서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가야산 일대가 불교와 밀접한 이유는 대중국 접근로에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내포(內浦)를 최남선이 삽교천과 무한천이 합수하는 지점으로 특정을 했지만 1694년 서산 유생 ‘이세양’은 숙종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리며 내포를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이중환의 택리지 보다 수십년 먼저 한 발언이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이다.
 
내포의 유일한 산이 가야산입니다. 가야산은 남으로 홍주 결성 동으로 덕산 북으로 면천 당진이고 동으로 해미 서산을 일컬어 내포라 합니다.

조선시대 바닷물이 만조시 덕산의 코앞까지 들어 왔고 만조가 바뀔 때 배를 띄우면 배가 썰물에 밀려 순식간에 경기만까지 나가는 천혜의 교통로를 이용 물상이 집결하는 것은 당연했고 더불어 외래 종교인 불교도 발전했다.

가야산 그리고 잃어버린 대가람 가야사는 지금 민과 관의 관심과 호응으로 조금씩 흔적의 일단을 들어내고 화려했던 가야산권 문화도 숨을 쉬려 한다.            - 글 이  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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