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시리즈 ] 청양 장곡사 약사여래불이 전하는 것
[충청 역사 시리즈 ] 청양 장곡사 약사여래불이 전하는 것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18 1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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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자복사였던 장곡사에 왕기(공민왕) 발원문에 서명하다.

청산도 백운도 아닌 것이 머리 검고 두 발로 걷는 양족존(兩足尊)이라 칠갑산 장곡사에 와 일주문에서 저녁을 맞는다. 해탈은 피안(彼岸)이다. 육조(六祖)는 '단경'에서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말했다. 이 언덕은 내가 발 딛고 사는 이곳이고 저 언덕은 내가 정신으로 지향하는 저곳일까.

절집에오면 사물(四物)을 먼저 본다. 지심귀명래가 울려 퍼지는 절집에 황혼이 내리는 순간 바라보는 사물은 얼마나 서사적인가. 장곡사 하대웅전은 찰지고 단정하다. 일대사(寺)의 대웅전의 좌측은 마음의 자리다. 심검당은 텅 빈 공간이다. 이것이 색과 공의 조화를 생각한 절집의 모양이다.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사물이다. 사물은 세상을 들깨우는 소리판이다. 사물성(聲)은 인간과 축생을 부촉하고 삼악도에 고통받는 중생은 물론, 윤회의 과정에 있는 중음신(中陰身)에까지 법고청신을 들려준다. 천수천안을 본다. 삼백존불 중 하나 백의존(尊)도 본다. 그 앞마당에 오두막한 운학루에 올라 큰 북(象鼓)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불소행찬'의 한 구절을 곱씹는다.

- 나는 무덤 사이에 시체와 해골들과 지낸다. 목동이 와 오줌을 싸고 침을 뱉기도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나의 귀에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한다. 나의 목과 얼굴에는 오랜 먼지로 인해 저절로 가죽 포대를 마련한다.

장곡사는 아득한 역사를 품고 있다. 약사여래불 복장 유물중 하나인 발원문은 아득한 장곡사의 역사를 전한다. 발원문은 고려말 1340년 친전사(親傳師) 백운(白雲) 스님의 인도로 고려말기 정적 관계였던 홍수 최안도와 그들의 부인들은 물론 정당문학 이언충 충선왕의 후궁 안경옹주 심지어 강릉부원대군 왕기(王琪) 즉 공민왕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발원자는 군부인(정4품관의 부인) 28명을 포함 총 1078명으로 '도로지(都兒赤)'등 몽고인까지 망라된다. 무려 천명이 넘는 고려불자들의 발원 내용은 여성적이다. 기왕의 약사여래의 덕목인 치병, 재난구제, 외침극복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여자로 출산의 고통을 덜어내고 훌룡한 자식을 생산하게 해 달라는 소망을 담은 발원 내용이 특이하다. 동시에 발원자들의 면면은 장곡사가 조선 초기 조선왕실의 자복사(資福寺)로 정해질 정도의 고려말 상당했던 정치적 위상을 보여 준다.

특히 발원을 이끈 '백운선사'가 주목 된다. 백운 경한스님은 고려말 태고 보우, 나옹 혜근과 삼정을 이루던 대선사로 고려말의 대표적 간화승이다. 백운은 그 유명한 직지심체요절의 편찬자이기도 하다. 장곡사 약사여래불은 엄청난 연구과제를 던져 준다. 장곡사 약사여래불은 당시대 가장 유망(?)했던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낸 타임머신이다.

근대에 이 발원문을 처음 대면한 사람이 이은창이다. 그는 청양교육청 공무원으로 1958년 당시 장곡사 주지와 약사여래불 복장품을 확인하고 이후 이사준, 황수영등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천명이 넘는 그 시대의 인물 군상들이 적나라하게 밝혀졌음에도 이후 서너편의 피상적 연구 논문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현실은 유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곡사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장곡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필자는 얼마전 '장곡사 보광암 비구니'에게라는 별고(別稿)를 보고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장곡사에 보광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그곳에 여승이 기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대의 선승인 경허스님이 한문으로 깨달음을 재촉하는 질문은 압권이었다.

-혹 분별의 헤아림에 족하지 못하거나 분별을 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둘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말해 보거라. 사오백 가지 드리운 버드나무 언덕이요 이 삼천 곳 풍악 울리는 누대로다. 이것이 둘이 아닌 소식인가. 안다면 어리석고 완악하고 모른다면 문득 서로 통하리라. 이러한 경지에 달했다 해도 단시 삼생 육겁을 참구해야 하리라. (경허 스님 글)

경허 스님은 장곡사 보광암 비구니에게,라고 적었다. 1907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글의 작성시기에 장곡사에는 보광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그곳에 도를 구하는 여승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청양군지와 청양문화원 자료 등을 뒤져 보광암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자료가 없었다.

하여 청양에서 지역신문 기자로 잔뼈가 굵은 지역문화 지킴이 김명숙 님을 찾아 장곡사 암자를 물었다. 이분이 장난(?)이 아니다. 지역신문 기자로 20년, 지방의원으로 8년을 향토문화 지킴이로 살았으니 지역 곳곳을 안 다 할 것이다. 그도 보광암은 모르고 자신이 어렸을 때 어른들한테 칠갑산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 장곡사에 딸린 암자 두 곳을 불태웠다는 말을 들었다 증언한다.

장곡사는 작은 절이다. 그러나 장곡사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관심과 연구가 부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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