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병계 윤봉구 선생을 생각한다
[충청 역사 칼럼] 병계 윤봉구 선생을 생각한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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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2월 조선 육대 성리학자로 평가 받는 녹문 임성주가(1711-1788)가 덕산에 살고 있는 병계 윤봉구(1681-1767)에게 편지 한통을 쓴다.

당시 성리학이 호론과 낙론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을 거치는 와중에 낙론의 중견인 임성주의 편지는 인상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도를 지향하는 나의 생각이 또한 감히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나태해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문하를 가까이 모시고 날마다 지론(至論)을 들으면서 보고 감동하여 덕이 진보하게 하고,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의문이 해소되게 한다면, 죽기 전에 조문(朝聞)의 소원을 풀 수 있을 법도 한데 서로 떨어져서 쓸쓸히 바라보기만 할 뿐, 뜻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결에 문하가 계신 곳을 향해 마음이 달려가곤 하면서, 어느 날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문하께서 혹 한마디 가르침을 내려서 깨우쳐 주실 수 있을는지요?  호론은 명분을 중요시하고 명분으로 의리를 주창(주의나사상을앞장서서 주장함)하는 사람들이다. 호론의 종장 윤봉구는 임성주의 편지를 받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윤봉구는 임성주의 편지를 받은 며칠 후 35세의 위백규의 방문을 받는다.

위백규는 25세때 전라도 장흥에서 충청도 덕산을 찾아와 윤봉구의 제자가 된 후 무려 16년간을 매년 한 두 차례 찾아와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윤봉구는 호락논쟁에서 인과 물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의 종장으로 위백규에게 인과 물이 다르냐 같으냐 묻는다. 위백규는 거침 없이 말한다.  ‘성즉리(誠卽理) 성이 곧 리인데 어찌 인과 물이 같겠습니까?’ 위백규는 41세 되던해 윤봉구가 사망하면서 부고에 호상에 이름을 올리는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백규는 장흥은 물론 전라남도 차원에서 호남의 3대 천재이자 호남 성리학의 대가로 기리고 선양하고 있다.  녹문(신양 녹문리와 유구 녹천리로 추정된다)에 은거하며 조선 성리학의 육대가로 평가 되며 전국적 인물로 부각된 임성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윤봉구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 없다.

임성주는 처음 낙론에서 자신의 학문이 완숙해지면서 호론을 지지하며 호락논쟁의 무게 중심에 영향을 준다.  윤봉구는 남당 한원진보다 한 살 위의 도반이자 스승 권상하의 충직한 제자로 스승의 유훈이 한원진에게 주어지자 죽는 순간까지 한원진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의리를 보여준다.

이런 그의 철학에서 위백규라는 걸출한 제자가 태어난다. 

호론은 상대를 차별하는 문제점은 있으나 이중적이지 않은 행동 철학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보수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윤봉구의 생은 명분과 의리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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