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덕산 효고리 매향비
[충청 역사 칼럼] 덕산 효고리 매향비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7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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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매향비가 존재하는 것은 특이하다.

홍성 남당리와 서산 해미 당진 정미 그리고 덕산 효고리 매향비는 가야산을 포위하는 형국이다. 효고리 매향비는 전국에 전하는 10여곳의 매향비중 비문이 가장 심하게 마모돼 내용을 판독할 수 없을 정도다.

이 매향비를 처음 탁본을 하여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 오윤희 교수다.  오 교수는 판독이 가능한 계미년과 이산 덕풍등의 지명을 참고하여 매향비의 제작 연도를 1043년 계미년과 1403년 계미년 사이로 추정한다. 국내에 발견되는 매향비가 모두 고려말 조선 초라는 학계의 연구성과가 반영된 것도 물론이다.

오  교수의 논지는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예산문화대전의 기록이 조금 이상하다. 이곳은 효고리 매향비를 천순 6년 1463년 작으로 특정을 한다. 천순 6년은 임오년이고 1462년이니 오류다.  

비문에 처음 두 글자를 6년이란 명나라 연호에 맞추려다 보니 생겨난 일로 생각된다.

한반도의 매향비는 고려말 조선 초 유행하던 미륵신앙에서 나온 불교 의식으로 바닷물과 밑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미륵이 하생 한다는 그날을 기대하고 한편으로 묻어 놓은 향나무가 고가인 침향이 되어 후세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덕목이 담긴 행사다.

침향은 중국 고대의 시가집인 고악부(古樂府)에도 전할 정도로 전거가 있다.

그대가 침수향 된다면 나는 박산향로 될께요(勸作沈水香儂作博山爐).

침향은 고대 사회에서는 금보다 비싼 귀한 약재로 통했다. 침향은 동양의 호사가들이 탐욕스럽게 원하고 구하려던 보물이었다. 조선실록 초기 기록에 태종이 고려시대 매향비를 조사하여 주변에 묻힌 침향을 찾으라는 특명을 내릴 정도였다.

중국을 다녀온 사신단이 겨우 구한 침향 한 두근을 종묘에 두고 사용케하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덕산 효고리 매향비는 이렇게 쓰여있다.

xx 6년 계미년 3월12일에 이산 덕풍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매향계를 만들어) 성밖 용오리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불전에 고하나이다.

봉우리와 만 사이에 (얼마간의 걸음)에 귀한 약재를 묻었으니 미륵께서 살피소서.

매향은 오늘의 고단한 삶의 과정에서도 내일의 사람들을 고려하며 무엇인가를 남겨주고자 했던 선조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지혜가 담긴 행사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작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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