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7편] 덕산 가야사의 오해와 진실
[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7편] 덕산 가야사의 오해와 진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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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를 통한 덕산과 조선왕실의 관계망을 살펴야…

  예산군과 덕산면 가야사지 인근에 화순옹주 헌종임금 태실 명빈박씨 연녕군과 남연군의 묘와 흥녕군의 묘지가 집중된 이유를 놓고 많은 담론이 생산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가야산 일대에 산재한 많은 불교 유적들과 매칭을 통한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요구는 가야산권인 예산 서산 홍성 지역도 관심을 기울인다.

  조선 왕실의 땅과 관련한 유물 유적이 덕산에 집중된 이유를 검토하면 숙빈 최씨(1670-1718)을 주목하게 된다.

  최씨는 영조의 친모로 덕산에서 취득한 땅문서 네 통을 남겼는데 가장 이른 것이 1696년 면천현 이세준에게 10결을 매수한 문서다. 이때는 최씨가 영조를 낳고 숙종의 총애를 받던 때로 당시 정1품 빈이 된 때다. 최씨는 1716년 덕산 배방곶 이생포락지 162결을 불하받는다. 내수사와 덕산현감이 공동으로 만든 문서다.
  최씨는 내친김에 초락리등 두곳에서 80결의 토지를 더 취득한다. 최씨의 땅이 덕산에만 240결(64만평-240만평)의 땅을 소유한 것이다.

  최씨는 어린날에 궁에 들어가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당쟁하던 시대 숙종의 여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이 군왕이 되는 초석을 깔아준다. 조선 팔도에 미쳤던 그녀의 엄청난 재산이 세제(후사가 없는 세자의 동생)시절 영조의 큰 힘이 되어준다. 덕산은 숙종의 또 다른 여자 명빈박씨와 그녀의 아들 연녕군 모자의 무덤이 있다.
  이 모자의 무덤은 경기도 있다가 조선총독부 시절에 이장되는데 덕산에 이왕직(왕실)의 토지가 존재했던 이유다.

  덕산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전을 하던 시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1827년 순조27년 8월25일자의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다. 이날 효명세자 앞에 관상감 박기수를 위시한 안태사 종사관 서표관 감역관 공장감등이 새로 태어난 왕자 헌종의 태실로 내려갈 전 관원이 도열한다.

  다음날 안태사로 임명된 이조정랑 이지연이 임명장을 받고 한달 준비기간을 거친 후 9월 27일 효명세자가 있는 수어당에 대신 정승 실무관등 20여명이 다시 모여 안택사 발행 일정을 논의 한다. 이 자리의 말석에 추사 김정희가 보인다. 
  김정희는 효명세자가 아끼던 신진 기예였다.

  안택사 일행은 11월6일 한양을 출발 10일 덕산읍성에 도착한다. 읍성동문 앞에는 충청감사 서준보와 덕산현감 정세교를 비롯 홍주목사 면천군수 대흥 예산현감 해미영장등 수백명이 안택사를 영접한다. 헌종의 탯줄은 봉합되어 덕산 객사 정청에 하룻밤 보관된 후 다음날 11일 이미 공사를 마쳐 놓은 가야산 명일봉 산록에 봉안된다.

  충청감사 서준보는 이날의 일을 장계로 보곻k고 안택사 이지연의 실무보고서 또한 같은달 15일 효명세자에게 전달된다.
  “연일 날씨가 좋았고 명일봉 가야산 산록의 좌향 길지는 산세가 지극히 좋고 읍성이 지척에 있어 더욱 좋았나이다.”
  효명세자는 안택사와 충청감사를 특별 포상하고 종사관을 비롯 공장 장인들에게 위로와 선물을 내리는 것으로 이 사업을 마무리 짓는다. 가야산 가야사는 기록상으로 숙빈 최씨가 덕산땅을 사들이던 시기까지 어느정도 사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사는 승정원일기에 한건의 기록을 남기는데 어영대장겸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구운몽저자 김만중의 형)가 가야사 토지 34결을 몰수 해야 한다 건의를 하고 숙종이 가납한 대목이 그것이다. 
  이 사건이후 가야사는 어떤 자료에도 유의미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식 이안눌 이삼환 이철환 윤봉구등의 시편에 간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이철환이 전한 폐사의 모습을 전하는 정도다. 가야사는 금탑운제가 자랑이었던 듯하다.

   현에서 십리에 가야사 보웅전 뒷편 산자락에 높은 바둑판 같은 자리 중앙에 오층탑이 있는데 탑 머리부분을 황동으로 씌우고 사면에 풍경을 달아 모습이 장대하고 교묘하다.

 ◇ 금탑운제(金塔雲梯)
在縣十里伽倻寺普雄展後山麓停峙一高臺如棋局其中央設塔五層上頭則以銅鉄色風磬形體之莊大制度之奇妙
-덕산현지.
   금탑운제를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 태백산 정암사에 있다. 현존하는 산록을 이용한 계단과 라마식 석탑의 모습이 가야사 금탑을 추측하게 한다. 가야사는 정확한 사력을 알 수 없으나 가랑압, 가랑압사 가야사로 사명을 유지하며 내려오다 숙종임금 말기부터 급격하게 쇠락 영조임금 말기에는 거의 폐사 상태였던 듯 하다.
 
  숙종임금때 가야사가 재산이던 40결의 땅을 몰수당했다면 더 이상 사찰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로인해 가야사를 기록했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가야사가 있던 동돈(洞墩)이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터이다’ 등장하는 긹으로  번창했던 가야사를 돌아보는 것이 아쉽다.

  대원군이 이장한 남원군 묘지가 가야사 금탑운제가 있었던 자리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덕산현지등  여러 기록이 그렇다고 한다. 대원군이 이장을 할 때는 가야사는 절터와 오랫동안 관리 부실로 거의 쓰러져가는 금탑이 형체를 겨우 유지하던 때라고 본다. 대원군이 멀쩡한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을 파괴 한 후 자신의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했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당시 겨우 20살의 방계 종친이 세상의 눈(정치기득권과 안동김문등)을 피해 천하명단처로 소문난 땅에 부모를 이장하며 절을 불태우고 승려를 내쫓는 망종을 떨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당 시대의 정서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근거가 된 '황현'의 매천야록은 유독 대원군에 대한 독설을 여러편 기록하고 있는데 모두 믿을 수 없는 황탕한 내용들이다. 대원군 부인 민씨가 벼슬아치들의 아녀자들을 모아 놓고 얼굴이 반반한 여자를 골라 대원군과 동침을 하게 했다는 등 어이없는 것들뿐이다. 이런 내용이 김동인과 정비석등의 소설가들에 의해 소설화 되면서 대원군의 가야사 이장 사건은 역사의 팩트로 변질 된다.

  덕산 가야사 그리고 조선왕실의 에피소드는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민적 스토리텔링으로 발전해야 한다. 지역의 문화발전은 지역의 문화역량에 달렸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 스스로 찾아 나설 때 비로서 결실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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