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예산의 선비들과 다산 정약용
[충청 역사 칼럼] 예산의 선비들과 다산 정약용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10.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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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7월 16일 다산 정약용은 예산 역참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청양 금정역에 도착한다.

정약용은 금정찰방 재임 5개월여를 금정일록이란 일기로 남겼는데 내용 태반이 예산 선비들과의 교우다. 정약용은 금정에 도착 한 후 사전에 얻은 정보로 보령에 숨어 있던 호서의 사도 이존창을 체포하여 천안 감옥으로 이송 한 후 예산에 본거지를 둔 성호 우파 학자들과 교우한다.

정약용은 덕산에 사는 성호 우파의 좌장인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내고 만남을 청 한 후 마침 예산 한강동의 선비 이수정의 상가를 찾아 조문한 후 천방산 아래에 살던 이도명과 이광교의 집을 찾는다. 사달이 이도명의 집에서 난다.

이날이 8월 23일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남인이면서 학문적으로 성호 우파였던 예산의 선비들은 정약용을 긴가 민가 했다.  그런 정약용을 불시에 맞은 이도명은 60세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정약용은 37세지만 정 3품관을 지낸 입장이었고 무관인 이도명이 함부로 대할 입장도 아니었다. 결례는 정약용이 먼저 저지른다. 정약용= 왜 혼자만의 공부에 빠져 있나요? 공부는 사회에 써야 되는 거 아닌지요?

이도명= 나를 닦기도 힘들거늘 어찌 세상까지 염려하겠소이까? 그리고 지금 댁이 남을 훈계나 하고 다닐 때요?
정약용= 공부는 개물성무지요. 나를 키워 사회에 도움이 돼야 합니다.
이도명= 뜬금없는 소리요. 허물부터 벗고 남을 논해야 하거늘...

이도명은 천주교인 혐의를 받고 내려와 호서의 사도 이존창을 체포하고 천주교인 대여섯명을 함께 체포하며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노력 하는 정약용을 고깝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약용은 이런 분위기 안에서 이삼환에게 예산 석담사(지금의 봉곡사 당시는 예산땅이었다)에서 성호 우파의 모임을 요청 한다. 모든 경비를 자신이 부담 하겠다는 제의였다. 정약용의 제의를 수락한 성호 우파의 학자들은 1795년 11월 1일 석담사에 모인다.

모인 사람은 총 13명으로 정약용 이삼환 이광교 이재위 이유석 이명환 오국진 심로 박효중 강이인 강이오등 태반이 예산 사람들이다.

이들의 만남은 11일간 계속 된다. 먼저 성호 이익의 학문을 논한 후 이익의 저작 ‘가례질서’를 교정 한 후 출판 준비를 마친다.

이삼환은 열흘간 정약용을 지켜 본 후 ‘그의 식견과 추진력이 탁월하다. 작은 허물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정약용을 성호학파의 일원으로 인정 한다. 정약용은 5개월간의 금정 찰방 생활중 3개월여를 예산에서 보낸다. 정약용은 자신에서 내려진 천주교 혐의를 벗고 성호 학파의 일원임을 인정받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것이 정약용의 금청찰방 5개월의 덕목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역사의 순환을 본다.

예산 출신 호서의 사도 이존창 이도명 이삼환 정약용이 당면 했던 역사의 부조리는 은원과 갈등 오해로 왜곡 되어 있으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신념에 살고 죽은 인간의 아름다운 교훈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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