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3백억 예산으로 면천읍성이 복원되고 있다.
[충청 역사 찾기 시리즈] 3백억 예산으로 면천읍성이 복원되고 있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27 17: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면천읍성의 1890년의 구한말 사진자료 다수 발굴
면첩읍성이 복원되면 비교 평가 가능

▷ 복원과 스토리텔링

면천은 조선 3백여개 부·목·군·현중 종4품관이 직임하는 군(群)이었다. 현(縣)은 종5품관 또는 종6품관이 보임된다. 면천은 2백여명의 이속(吏束)이 각자의 직무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업무에 임했다.  우리가 아전(衙前)이라 말하는 관아의 실무자들은 지방 행정 실무와 나름 학문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조선의 아전은 문자(한문과 이두)의 해독능력과 문서작성 서사(문서 꾸미기) 산술(수학) 법전에 대한 이해와 활용도가 필수였다. 동시에 아전들은 국가(조정)의 운영체계와 통치원리를 체득해야 했고 유교(주자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했다.

조선의 아전은 따로 시험을 보는 방식이 아닌 일종의 가업으로 부형(父兄)을 통해 배우는 한편 열살무렵부터 관아의 통인으로 들어가 육방권속의 업무를 체험으로 익히는 방식이었다. 아전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고 자식들 또한 그 직업을 소망했다.

아전직이 지방행정의 실권자로 실속이 있는 자리였던 때문이다. 아전의 업무는 세금의 분정과 수납, 신역의 충역과 충군(병무), 각종 벌금 단속과 치죄로 하나같이 백성들의 삶과 생활의 이해의 최전선에 선 탓에 나름대로 갑의 위치였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아전들의 업무는 첩보문, 이문, 완문, 사송판결문등을 작성하고 이안(吏案) 선생안(先生案)등 지방관아와 아전들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했다. 조선의 아전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방의 양반층과는 지향점이 다른 방향에서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지방 관장 또는 사또라 불리던 군수 현감 등의 위세는 대단 했다. 일례로 면천의 한 촌에 살던 백성이 군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개의 문을 넘어야 했다. 면천성의 남문을 지나 관아로가 나오면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 앞에 서게 된다. 외삼문은 건장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삼문이란 말은 출입문이 3개로 좌우문은 아전들과 백성들이 중문은 군수가 다니는 문이었다. 외삼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면천의 풍악루가 해당된다. 지금의 풍악루 1층은 빈 공간이 아니라 3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풍당당한 외삼문을 지나면 원옥(圓獄)이 있고 다음에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내삼문부터 관아의 행정관소(館所)다. 이 공간 안에 객사, ‘동헌’, 질청(作廳) 등이 자리한 것이다. 면천관아의 아전들은 서 씨, 유 씨 등이 세습을 했다. 박지원 군수시절 아전 유씨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조선시대 관아에는 춘향전에 나오는 체신 머리 없는 이방류의 인간은 없다. 그런 인문들은 관아의 체계상 존재할 수도 없었다.

조선의 아전들은 뼈속부터 전문가였다. 열살부터 관아의 통인으로 들어가 업무를 익혔고 50살 무렵에 육방의 책임자인 방(房)에 보임될 수 있었다. 지역행정 40년이면 그야말로 달인일 것이다. 면천읍성의 스토리텔링에는 읍성의 중심이었던 관아문화의 검토부터 필요하다. 공간을 만들었다면 그 공간을 채울 내용물 즉,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읍성의 모습은 어떠했나?

면천읍성은 조선 세종 대 난상토론을 거쳐 완성된 관방시설이다. 당시 정승 황희가 면천보다는 서천이 급하다며 제동을 걸자 사군개척에 공을 세운 최윤덕이 직접 현장을 살피고 충청도 해안 방어기지로 면천을 주자 일사천리로 완성된다. 면천성은 관방시설로 민가가 대규모로 모집된 성이 아니다. 위급 시 주민이 성안으로 대피하는 성격인지라 성의 둘레가 1200m의 소규모 성이다. 조선 초기 쌓은 비인남포성과 비슷하다.

면천성은 평지에 건설되어 면천군의 행정의 중심인 관아와 유향소 그리고 극히 일부의 가옥만이 성내에 있었고 읍민은 성의 남서문 일대에 촌락을 이루어 살았다. 성내에는 동헌, 내아, 질청, 조종관, 반월루, 풍락루, 형옥, 군기고, 사령청, 노비청, 마사 등 40여 동의 각종 시설과 대나무로 두르고 연꽃으로 가득했던 군자지와 그 위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름답던 읍성의 모습이 각종 문헌에 보인다. 선조 때 사람 심수경이 노래했던 반월루, 당나라 시인 이구령이 노래한 당시 영주성 남문 원기루에서 취해온 원기루 등 하나 하나 근거를 찾아보면 튼실하고 찰지다. 면천을 오갔던 심수경, 김종수, 박지원, 김윤식 등 조선의 유수한 명사들의 살아있는 에피소드가 면천관아의 복원과 궁합이 맞는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본다.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직한 시간은 37개월이다. 4여 년에 걸친 조선 군수직은 예외적이다. 불과 1년에 불과했던 군수직을 오래도록 한 이유는 박지원에 대한 정조임금의 특명 태문이었다. 강압적이지 않고 서학을 이론으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박지원이 적격이었고 당시 면천이 서학세력이 강했던 탓이다. 연암은 면천에서 많은 성과를 낸다. 그 중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연암은 면천에서 아전 유한집을 주목했다. 연암은 자신의 아들 박종채와 동년배인 유한집의 문재를 알아보고 아들과 함께 학문을 지도했다. 유한집은 훗날 문학으로 성취를 하여 대동시선과 풍요삼선 등 조선의 유수한 시선집에 작품을 수록하는 문인으로 성장한다. 유한집은 훗날 면천에 7년을 유배와 있던 김윤식의 면양잡록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한집의 손자 윤지환이 면천 아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시책을 들고 와 평을 요구한 것이다. 유한집의 동생 유학금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박지원이 양양부사로 이임할 때 양양으로 따라가기도 했다. 박지원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고 짙다.

면양잡록을 잘 읽으면 생생한 면천의 역사가 보인다. 당신의 군수, 좌수, 이방, 형방 등의 실명이 등장하는가 하면 당시 영탑사를 왕래하던 승려들의 이름과 삶의 모습이 보인다. 영탑사 아랫마을 사람들의 순박성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단초다. 면천읍성 복원은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으로 당진군수를 지낸 후손에게서 면천읍성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와 여러점의 당시 자료를 구했다.

동헌과 내아 질청으로 보이는 사진등이다. 면천읍성이 행정차원에서 지금 복원중이니 복원이 되고 나면 복원의 모습과 비교가 되리라 본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있고 수백억 예산이 있으니 잘 되리라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