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 칼럼] 연암 박지원도 오류를 범한다.
[충청역사 칼럼] 연암 박지원도 오류를 범한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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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華夷)와 소중화(小中華)에 스스로 젖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 사이에 중국 강남(江南)은 이상향이었다.

강남은 화이문명의 본향이자 근거지로 중원의 주인이 몇 번씩 바뀌어도 그들의 화이관은 북풍의 야만이 강남으로 흘러와 강남의 문풍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야만을 씻을 수 있다는 중국의 자긍심(?)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동남부 지방 강남은 수려한 경관과 온화한 기후 속에 풍부한 물상으로 공동체의 항산(恒産)이 보장되는 특성 덕에 시와 음악 출판 등 각종 문화가 발전하여 지역의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이 균형을 이루는 지역이었다.

박지원은 이 강남을 몹시도 부러워했다. 박지원의 취미 중 하나가 강남의 번화한 도시의 시가지를 그린 성시도(城市圖)를 펼쳐놓고 감상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의 생각은 공동체가 함께 잘 사는 것이었고 특히 지독하게 가난한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발전한 생활방식을 주목했다.

박지원은 이미 북경 연행을 통해 발전한 중국의 현실을 목도했고 차별화된 조선과 중국의 현실을 극복할 생각 없이 오랑캐 타령만 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현실인식에 절망한다. 박지원의 고군분투는 글쓰기와 제자 육성에 집중하면서도 12년 남짓한 관직 활을 통해 당시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박지원은 현실에서 현실을 구하려했다. 눈으로 보고 효능이 있다면 현실에 적응을 해보는 실사구시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박지원은 1797년 6월 국왕 정조로부터 특이한 임무를 하나 받는다. ‘이방익’의 사건을 책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방익은 무인으로 제주도로 아버지를 보러갔다가 바다에서 사라져 8개월 후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나타나 조선을 놀라게 한 사람이다.

정조는 이방익을 대면하고 대경실색한다.

이방익이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대만을 거쳐 중국 강남을 거쳐 북경 의주 한양으로 돌아온 경로도 놀랍지만 정조는 그가 양자강 소주 악양루(岳陽 樓) 자양서원 등을 둘러보았다는 말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양자강 악양루 자양서원 등은 조선 지식인들이 꿈에 그리던 곳으로 실제로 조선인 중 그곳을 다녀온 사람은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

정조는 이 사건을 박지원에게 책으로 쓰게 했고 박지원은 면천군수 1년여 만에 ‘서이방익사(書李榜翼事)’를 완성한다.

그런데 박지원은 이방익을 낮추어 보는 데서 오류(?)를 낸다. 이방익이 미천한 무인으로 한문을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방익은 박지원보다 20년 연하였으나 당시에 박지원보다 2품이나 높은 고위직이었다.

박지원은 이방익이 정조와 대면한 진술서와 취재기록을 토대로 ‘서이방익사’를 지으며 이방익이 강남의 양자강을 거슬러올라 악양루를 봤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 단정을 하며 이방익의 일을 지극히 보수적으로 기술한다. 이방익은 스스로 '표해록'을 지어 오늘에 전하는데 소주와 동정호 금산사 악양루 자양서원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의 취재는 정확해 보인다. 실제로 이방익은 악양루에 올라 소상팔경의 시를 짓는 등 현장을 다녀온 사실감을 반영하고 있다.박지원은 이방익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만나고자 했다면 곧바로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박지원은 ‘서이방익사’에 이렇게 독하게 지적한다.

-방익이 악양루를 말하는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而其日岳陽樓者殆如設夢)

이것을 보면 지식인들 사이에도 서울 구경도 안해본  사람이 서울 살던  사람을 성토한다는 말이 유언이 아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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