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칼럼] 시인 윤봉길
[충청역사칼럼] 시인 윤봉길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13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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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대협객  윤봉길의사 가슴 따뜻한 시집 세권을 남겨.

좋은 책은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인생과 역사의 통찰력은 단순한 소일거리의 독서나 영화 드라마 등으로는 절대로 길러지지 않는다. 시대의 통찰력은 역사의식에서 나온다. 역사의식의 고양은 오직 좋은 책을 읽는 것에서 나온다. 그것 외에는 없다.

책은 곧 글이다. 윤봉길 의사의 시를 읽는다. 윤의사는 독립 투사이자 만고의 협객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따뜻한 시인이기도 했다. 윤의사는 세권의 시집을 남겼다.

피 끓는 청년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들이 왜 와서 왜 왈 거리나
피 끓는 청년 그대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와서 되가는데
왜놈들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끓는 청년들은 잠자는가.
동창에 서색(瑞色)은 점점 밝아 오는데...
피 끓는 청년 그대들아 준비하세

1932년 4월 20일 윤봉길 의사가 쓴 토혈(吐血)의 시다. 윤의사는 이 시와 함께 고향땅 예산에 사는 아들 순과 담에게 보내는 시 한편을 더 쓰고 몇 일 후 홍구 공원에서 역사적인 거사를 치룬다. 이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함께 조선 독립투쟁의 양대 사건이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윤의사가 수십편의 한시와 한글 시를 남긴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윤의사가 고향에서 연극 체육 상조 야학등의 모범적인 사회계몽 활동을 벌이며 큰 주변의 호옹을 얻자 경성의 언론까지 윤의사를 주목하기에 이른다. 이때 윤의사를 월간 ‘시조’의 기자 이흑룡이 취재를 오는데 윤의사의 불꽃같은 운명이 이 만남에서 결정 된다. 월간 시조는 미국인 목사가 1910년 창간한 잡지로 1944년 일제에 의해 폐간돼 다시 복간되어 지금껏 발행되는 한국 최고의 잡지다.

이흑룡은 청년 윤봉길을 인터뷰하며 중국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단체들의 국내 활동을 소개했고 이 만남이 청년 윤봉길을 사기(史記) 열전의 협객행으로 이끈다. 장부가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가 바로 그것이다.

윤의사는 사기 열전에 나오는 협객 예양이나 형가의 삶이 당 시대 조선에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과 결단으로 두 살 난 아들과 아내의 뱃속에 자리한 둘째를 뒤로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다. 윤의사가 결행한 홍구공원 폭탄 사건은 일본 육군 수뇌부를 초토화 시켰고 여파는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다.

일제는 대대적인 독립 단체 색출에 나서는 한편 윤의사의 고향인 예산군의 예산을 필요 경비를 제외하고 끊는가 하면 윤의사의 집안을 겁박하여 족보에서 삭제시키는 치졸한 복수를 하기도 한다. 조국이 해방된 1946년 윤의사의 고향인 예산을 방문한 김구선생이 예산 역전에서 수많은 지역민들 앞에서 이 족보 사건을 언급하여 고향땅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윤의사가 남긴 시집은 담담한 한시와 수편의 계몽적 한글 시로 되어 있다. 1920년 초 월간 잡지 시조의 이흑룡기자의 언급속에 청태같은 청년 윤봉길의 기상이 아주 조금 남아 있어 반갑다. 다음편에 그 이야기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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