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찾기 시리즈] 백제 부흥운동군-나당연합군 최후 격전지 가다
[충청역사찾기 시리즈] 백제 부흥운동군-나당연합군 최후 격전지 가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17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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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릉윤성은 공주에서 정산 방면으로 가는 국도변 계봉산에 있는 산성으로 아직도 산 정상에 석축의 유적과 동문지 각종 와당편이 수습되며 과거의 한때를 반추 하게 한다. 불과 표고 200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에 있는 폐허의 산성지가 고대의 한순간  백제 신라 당나라 동양 3국의 주목을 모았던 곳이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  두릉윤성은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답설인귀서’등에 특정된 역사의 장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조다.

백제의 여증이 남잠성에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주둔하고 당군을 괴롭힌다.
삼국사기 지리지 웅천조는 어떤가. 열기현 일명 두릉윤성 또는 두곳성 윤성이라 한다.
두시원악을 역사학자 이병도는 청양군 정산이라 했다. 두시원악의 뜻을 백제 고대어를 연구한 학자의 말을 빌려 보면 윗쪽에 있는 높은 산(사비에서 보면 북쪽의 산이 칠갑산이다)이라 한다. 두시(豆尸)는 음득표기자인 豆와 씨끝말인 -ㄹ을 나타내는 尸로 고대의 단어에 빈발하게 보이는 글자다. 두시원악에서 좌평 정무가 부흥군을 이끌고 대당 대 신라를 상대로 광복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는 이후 두릉윤성의 치열했던 36일간의 혈전을 기술 하고 있다. 두시원악이 정산이라면  정산의 계봉산에 있는 두릉윤성이 정무 장군의 거점이었음은 분명 하다. 대동여지지 지리지에 그 답이 있다.

윤성현 본 백제 열기현(尹城縣本百濟悅己縣).
통일 신라시대에 ‘윤성현‘이라 한곳이 본래 백제의 열기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경덕왕때 열성현으로 바뀌었다 했다. 정무가 바로 이곳 두릉윤성에 백제의 유민을 모아 광복 전쟁을 벌인것이 분명 하다. 661년이니 백제가 망하고 1년후다.
660년 7월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망국을 고했다. 웅진으로 몸을 피했던 의자왕과 그의 가족등 수천명이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고 당은 아에 웅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의 망국을 현실화 했다. 그러나 백제는 다시 일어난다. 왕족인 복신이 깃발을 들자 곧바로 20여성이 호응을 했고 그들은 힘을 합하여 사비 도성을 포위 공격 하며 기세를 올린다. 사비가 함락 된지 불과 두달여만이다.
광복군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왕족인 풍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 한편 백제 전역에서 일어나는 도침 흑치상지 정무등과 연합 세력을 이루어 사비와 웅진을 포위 하고 신라와 당을 고립시킨다. 이때의 긴박함이 답설인귀서에 보인다.
강서(江西)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강성하다는 이 기록은 웅진에서의 기록이니 주류성 (홍성) 두릉윤성(정산) 임존성(예산)이라는 연구가 맞다는 결론을 준다. 주류성이 부안이니 한산이니 아예 주류성이 두릉윤성의 별칭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어 하는 말이다. 광복군의 거센 공격에 당군은 거의 아사 직전에 직면한다. 이때 웅진에 있던 유인괘는 필사적으로 신라에 구원을 청한다.
이에 놀란 신라는 28명의 장군으로 구성된 지원군을 보내어 웅진과 신라의 교통을 막고 있던 대전 지역의 광복군을 공격한다. 우술성(회덕)에서 백제군 천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세우며 겨우 웅진도를 개척한 신라군은 내친김에 두릉윤성으로 진격한다. 장군은 신라의 명장 품일과 양도였다.
두릉윤성은 웅진과 사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요충지다. 두릉윤성의 동쪽 목면 지곡리는 얼마전까지 금강물이 들어오던 곳이다. 3월 15일 두릉윤성 남쪽에 집결한 품일 부대는 숙영지를 정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그틈을 노린 광복군의 대대적인 기습이 벌어진다. 아마도 어둠을 이용한 야간 기습전이었을 것이다.
이 기습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신라군은 군대를 고사비성(古沙比城)까지 물린다. 고사비성을 들어 어떤 학자는 부안 부근 어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고사비성은 사비강이 있는 은산 어디쯤의 성이었을 것이다. 두릉윤성에서 은산은 불과 십오리 거리다. 신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세를 취한다. 무려 36일간의 길고도 지루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 전체를 통해 광복군의 전투 기사로는 최대 최고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던 것이다. 결국 신라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를 한다. 대패를 한 것이다. 일이 이리되자 신라는 왕이 친정을 한다. 대장군 김유신까지 참전한다.
신라군은 웅진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당군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웅진 백강의 중간 지점을 도강하여 두솔성을 지나 주류성으로 진격을 한다. 각성(角城)으로 알려진 칠갑산의 성인 두솔성을 쉽게 공취한 신라군은 주변의 두릉윤성도 함락 시킨듯 하다. 두릉윤성의 함락기는 기록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윤성을 함락한 기록이 있고 이 지역에 정무 장군이 성이 함락되자 동문에 자신의 애마를 죽여 묻고 자살 했다는 전설이 있는 것을 보아 그렇다.

두솔성은 김정호의 대동여지에 두솔성 = 자비성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홍성의 재야 사학자 박성흥옹은 삼국사기 두솔성이 곧 칠갑산성이라 주장한다. 사실 칠갑산 정상 7부 능선에 성터가 있다. 90년대 공주대 역사학과에서 지표 조사를 통해 신라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성이라는 의견을 낸바 있다.
 4000미터가 넘는 대규모 성터로 백제 시대는 물론 신라 고려에도 드문 큰 성이다. 그러나 조사보고는 성을 판축 하다 중단한 성으로 보인다는 의견이다. 두솔성이 칠갑산에 있던 성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할 듯 하다. 그러나 두솔성이 꼭 칠갑산 정상에 있는 성일 필요는 없다. 이 부근에는 백제의 산성지로 추정되는 여러곳의 성터가 더 있기 때문이다.
 신라군은 금강을 도하 도솔성 주류성 임존성으로 공격을 한다. 진군로와 작전 개념 전투기록등은 다음편에 알아 보기로 하고 두릉윤성을 더 살펴보자. 두릉윤성은 계봉산 정산에 있는 작은 산성이다. 길이가 560미터로 많은 수의 군대가 장기 주둔 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아 보인다.
그러나 두릉윤성은 산성과 연결을 하면 백곡리 토성과 하나로 연결이 된다. 백곡리는 계봉산성의 남쪽 마을로 열기현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이 마을의 주변에 백제식 토성이 있다. 아직 남아 있는 한쪽 성터를 보면 마치 사력댐을 연상케 한다. 이 토성도 지표 조사에서 백제식 토성이라는 의견이 나온바 있다.
두릉윤성의 뜻이 두루미성이라는 언어 학자가 있다. 백곡(白谷)이란 지금의 지명도 두루미 횐 마을등에서 유례되었다는 것이다. 두루미는 횐새다. 두릉윤성은 사비를 지키던 북쪽의 중요 관방지다. 백제가 망하자 좌평 정무가 가장 먼저 광복군을 일으킨 곳이 이곳이다. 정무는 백제 광복군 지휘부중 복신과 더불어 직위가 가장 높은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윤성 작성등이 함락되자 해골이 들판을 뒤덮고 농잠이 모두 황폐화 되었다고 적고 있다. 철저하게 파괴된 전쟁의 휴유증일 것이다. 아쉽게도 정무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성과 함께 장열하게 전사 했다는 전설이 정산 지역을 떠돌고 있을뿐이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등이 복권의 절차를 밟아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만큼 정무 장군 또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 하다.

지금 두릉윤성은 청양군에서 향토유적지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도 뜻을 모아 두릉윤성 현창회를 구성( 이춘호 전갑수 이정상 임두빈등 30여명) 산성의 보존과 역사적 자리매김에 동부서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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