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충청도와 홍길동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충청도와 홍길동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4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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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공주 홍성지간에서 마음껏 활개를 친다.

연산군실록과 중종실록에 남아 있는 위의 홍길동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며 역사상에서 묻히고 지역에서 조차 잊혀진다. 지역에서는 역도의 고장이라는 오명을 씻어 내기 위해 더욱 빨리 잊으려 노력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 홍성 지간의 홍길동의 그림자는 생각 이상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홍길동은 이 지역에서 이몽학과 동일 인물로 인식될 정도로 혼동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나타 나고 있다. 공주 무성산의 홍길동 전설과 매우 닯은 전설이 부여군 은산면 팥죽 거리에 전한다. 전설을 간략 하게 적어 보자. 

이몽학은 노모와 누이가 함께 살았다. 이몽학은 힘이 장사였으나 지혜가 누이보다 미치지 못했다. 누이는 그런 이몽학의 정신을 고쳐 주고자 힘과 지혜 겨루기를 했다. 이몽학이 나막신을 신고 하룻만에 한양을 다녀 오는 동안 누이는 10리 성을 쌓는 내기였다. 내기는 지는 사람은 죽인다는 살벌한 것이었다. 둘 사이의 살벌한 승부가 시작 되었고 누이의 속도가 빨라 성문을 조금 손보면 끝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둘 사이의 내기를 지켜 보던 노모가 말릴 수 없는 승부임을 알고 이왕이면 아들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팥죽을 쑤어 딸에게 주며 공사를 방해 했다. 누이가 노모의 정성을 외면 할 수 없어 몇 수저 팥죽을 뜨는 순간 이몽학이 도착 했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누이의 목을 칼로 쳤다. 누이가 들고 있던 팥죽 그륵이 쏟아 졌고 이 때 부터 팥죽동이라 불렀다.  이 전설은 무성산의 홍길동 전설이 차용 되어 나타난 전형적인 경우다. 홍길동 전설과 나막신이 철신으로 그리고 송아지를 끌고 간 에피소드가 빠진것 외에는 동일 하다.

홍길동과 이몽학은 불과 80년 상관을 두고 이 지역의 민심을 공유 했던 인물인 만큼 그들의 행적이 지역민들 사이에 서로 상충 혼동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군 은산면은 무성산에서 불과 10키로 정도 떨어진 곳이고 이몽학난의 중요 거점이기도 한 곳이다.  이 부근에 전하는 홍길동과 이몽학의 전설지를 간추려 보자. 공주시지 청양군지 부여군지 지명 전설편에서 간추린 것이다.

무성산성(공주시 우성면)- 홍길동이 쌓은 성이다.
토굴(공주시 우성면)- 홍길동이 도술을 연마한 곳이다.
무량사(부여군 외산면)- 미륵이 이몽학으로 화현 하여 온 곳이다.
안방죽(부여군 홍산면)- 이몽학이 살던 곳이다.
방죽골(부여군 홍산면)- 이몽학의 생가터로 파가 저택 된 곳이다.
둔내 (청양군 청남면)- 이몽학이 군사를 훈련한 곳이다.
팥죽동(부여군 은산면)- 이몽학과 누이의 전설.
금반장(청양군 정산면)- 홍장군의 무덤이다.
목넘이재(청양군 장평면)- 이몽학의 가족이 참수된 곳이다.
위의 역사상은 기록으로 전하지 못하던 반역의 사실이기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다 이 지역의 행정 책임자로 내려 왔던 허균의 주목을 받고 의적 홍길동으로 다시 태어 난다.
홍길동은 이몽학과 한 스펙트럼이 되어 허균의 저항 정신과 괴벽적인 성격까지도 담아 내는 걸작이 된다.  이로부터 이 지역에는 두고 두고 홍길동을 자처 하는 군도(群盜)가 계속 생겨 난다. 
그중 구한말 조선 군도의 비조인 맹사진의 출현은 실물 홍길동의 후예로써 조금도 손색이 없다.
소외 활빈당을 저처 하던 맹사진은 홍주 연산 사이를 무상으로 출몰 하며 관아를 습격 한다.
맹사진에 습격을 당한 관아는 연산 홍주 회인 태안 비인 옥천 상주 인천 통진등 수륙 양면이다. 맹사진은 활빈당대의기를 내세우고 의적 홍길동의 후예를 자처 했으나 그들의 단훈을 보면 의적과는 동떨어 진다. 구한말의 추안(형조 조서)에 나타난 활빈당발영(훈)을 보자.

우리는 다음 세가지를 잘한다.
갑. 돈 안주면 불놓는다.  

을. 돈 안주면 유부녀를 겁탈 한다.

병. 돈 안주면 묘를 파 버린다.

이들이 활빈을 내세워 관아와 지역 토호들을 습격 하고 재물을 뱃았은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재물을 백성들과 나누어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가져가기 쉬운 재물외 곡식등을 남겨 놓아 백성들이 그것을 가져 갔다가 관군의 곤혹을 치루는 장면은 있다.

구한말의 활빈당은 의적을 앞 세우기는 했으나 결국은 도적의 무리에 불과 했다. 그나마 같은 시기 이 지역에 들끓었던 동학교도와 혼동을 일으켜 관군에 의해 활빈당과 동학이 공비로 몰리는 과오만 있었다 할 것이다.

맹사진외에도 이 지역에는 길삼봉 이칠성 김성숙등 기라성 같은 군도의 두령이 있었다. 이들 군도의 출현은 결국 이 지역에 뿌리 박혀 있던 길동선생(활빈당은 그렇게 불렀다)의 인식이다.

홍길동은 호서에서 살다 죽은 호서인이다. 홍길동 그를 빼고 홍길동전은 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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