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찾기 시리즈 3편] 백제의 잃어버린 사찰 칠악사
[충청 역사찾기 시리즈 3편] 백제의 잃어버린 사찰 칠악사
  • 충남투데이
  • 승인 2019.06.0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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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잃어버린 사찰 칠악사(漆嶽寺)

청양이 사비 백제의 정신적 고향이란 말은 명산 칠갑산과 산곡을 흐르는 지천 탓이다. 칠갑산은 칠악이라 부를 정도로 사비 백제가 숭상하던 산이었고 지천은 칠갑산을 휘돌아 천장대 앞에서 금강과 합수하며 여름 장마철이면 장평 평야를 가득 물로 채우는 장관으로 당시 백제인들을 압도하고도 남는 하천이다.
결코 높지는 않으나 천지조우형국의 산세와 사방으로 균등하게 내려 뻗은 신묘한 산세는 음양오행에 충실했던 당시 백제인의 이데오르기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기에 웅진에서 불과 1백리 거리에 있는 사비로 천도를 하기에 이른다.
칠갑산은 사비의 진산으로 당시의 음양오행의 철학을 만족시켰다. 근초고왕 때 도읍을 한수로 옮긴 백제는 22대 개로왕에 이르러 일대 위기를 맞는다. 전쟁터에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다음 왕인 문주왕이 도읍을 옮겨온 웅진은 결코 백제 왕실에 평온을 주지 못했다.
문주왕으로부터 삼근왕 동성왕등이 차례로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성왕이 나서 도읍을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된다.
성왕은 성군의 자질을 갖춘 군주였다. 그는 일본과의 국교를 강화하고 인도로 승려를 보내 정통 불교를 도입하는가 하면 신라를 공격해 백제의 국력 재기를 선언 하는등 고대국가의 군주로써 손색이 없는 왕이었다.
그런 성왕도 웅진 왕실에 일어나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을 접하고 도읍을 천도할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수도를 천도한다는 것은 엄청난 국력의 소진과 그에 따른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왕은 이를 슬기롭게 넘기고 사비 천도를 이끌어 낸다. 웅진에 도읍을 옮겨 온지 불과 64년만이었다.
웅진으로 내려와 잇따른 왕실의 재난을 피하려 서둘러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 나간 아들을 격려하러 나갔다가 신라군에 사로잡혀 난살 당하는 화를 당한다. 웅진에 관련되었던 5명의 왕 중 4명이 비명에 죽는 웅진 왕실의 비극의 대미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비밀...

지난 1993년 12월 부여 능사리 고분 정비 작업중 한 목조 수조 안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 대향로는 그 아름다움과 세밀함으로 세상의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높이 61.8㎝, 몸통 최대 지름 19㎝ 크기의 청동 향로 위에 천변 만화의 세상살이를 녹여 놓은 백제 장인의 순도 높은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이 세계적 예술품은 가히 국보급이었다.
봉황이 여의주를 품고 있는 형상 아래 42마리의 짐승과 5인의 악사 17명의 온갖 인물이 있는가 하면 74개의 산 봉오리와 20개의 암석 6종의 식물 등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그려진, 청동 주물 예술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이 대향로는 1995년 능사리 사지에서 사리감이 발견되어 567년 위덕왕이 능사리 왕릉지에 능사를 짓고 백제 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로 밝혀졌다. 아버지 성왕이 신라군에 비명 횡사 하자 무려 10년간을 왕위 등극을 밀며 절치부심 하던 위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역작으로 만들게 했다는 주장이 이곳에서 나온다.
95년 유성에서 있었던 학계의 토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주장이 나온다. 금동향로가 불교와 도교가 습합한 모양의 제사 도구라는 대체적인 논조 속에서 나온 이 주장은 금동 대향로에 느닷없이 칠악사가 끼어든 때문이었다. 중국 정주대 교수로 박산향로 연구의 권위자인 원위청 교수는 금동향로의 봉황을 천계[鷄]라 주장했다.
원교수는 고구려와 백제가 천계를 숭배했다는 사료를 인용하며 금동향로가 성왕과 칠악사와 연관이 있다는 논조를 펴 주목을 끌었다. 천계는 하늘의 닭으로 고대 국가에서 신성시 하던 상징으로 바로 이 천계가 목에 알을 품고 발로 밟고 있는 것은 고구려 백제의 난생 설화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능사리 사지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바로 그 칠악산이라 주장한다.

칠악사는 어떤 사찰인가칠악사는 어떤 사찰인가

중국의 역사서에 백제에는 온 나라가 절이고 승려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침류왕기 불교가 들어온 이래 불과 1백년만에 백제는 그야말로 불국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중국의 모든 역사서에 등장 하는 백제 시대의 절은 대통사 왕흥사 칠악사 오합사 천왕사 도양사 미륵사 보광사 호암사 오금사 백석사 사지사 북수덕사 칠암사 등 불과 14개로 훗날 백제 가람으로 알려진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 등의 유적만큼이나 적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왕실은 천신과 지신에 대한 밀착된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고이왕은 5년, 10년, 14년, 나라에 한발이 있을 때마다 땅에 제사 지냈고 다루왕 때도 그랬으며 아신왕은 친히 402년 여름 한발에 벼와 풀들이 말라 죽자 횡악에 가 기우제를 지냈다. 전지왕은 동명왕묘에 기우제를 드리고 대 사면령을 내리는 등 중기 백제 왕실의 제천의식은 돈독했다.
그러나 400년부터 600년 사이에 갑자기 산천에 제사 지내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교가 명실상부하게 백제의 정신적 이데올르기가 된 것이다. 이 시기는 웅진 백제 시대와 사비 천도의 시기로 백제가 문화국가로 자리 잡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웅진 사비 천도기는 백제가 안으로 통치 기반을 잡고 밖으로 신라와 극렬한 전쟁을 치루는 등 역동의 시기였고 이 와중에 예기치 못하던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 웅진 왕들의 흉거와 성왕의 죽음 그리고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갑작스런 흉거등이 또 다시 제천의식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 대목에서 칠악사가 대두된다. 칠악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조에 단 한 줄 명기된 사찰이다.

왕이 칠악사로가 기우제를 지냈다.
칠악은 칠갑(七甲)으로 지금의 칠갑산이다. 칠악사는 사비 부여의 인근 칠갑산에 있었던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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