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찾기 기획 시리즈] 내포 그리고 내포의 의미
[충청 역사찾기 기획 시리즈] 내포 그리고 내포의 의미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1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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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택리지를 말한다. 영조시대 충청도로 은거해 금강변을 오르내리며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충청도와 내포지방에 대해 찰진 정보를 남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도발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이중환이 충청도 전 지역을 발품을 팔아 기록 했다고는 하나 정밀함이나 정보의 질이 신동국여지승람을 능가 할 수 없고 산세의 아름다움과 지세를 피력 했다고는 하나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윤선도의 구산구곡가를 뛰어 넘지는 못한다.

그뿐인가. 이중한의 택리지 곳곳에 보이는 풍수 이론은 조선의 유행 풍수론이던 호순신론이나 명산론등에 비교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중환은 이들 정상급 정보와 문장 이론등에서 딱 한 발짝 물러나 자연과 문장과 풍수를 논하며 일류들이 놓친 틈새시장을 조명 한다. 이곳에 택리지의 의미가 있다.

ㅡ강경은 생선과 소금을 사고팔며 경기가 살아 있다. 한양과 조운이 연결 되고 내륙의 문물이 모여들어 흝어 지니 사람들이 매매로 돈을 벌어 부를 이룬다.

이중환이 지리와 풍수등을 살피기는 했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가 중국과의 문화 교류와 사대부들이 벌이는 시대적 갈등을 말하기도 했지만 진정 그가 하고자 한 말은 인간의 삶이다.

생선과 소금을 사고팔며 심지어 외상 거래까지 하던 상인들의 정겨움과 믿음의 상술 속에서 당대의 비합리적인 사회 체계와 고루한 유교의 인식 아래 골병이 들어가던 조선 사회에서 한줄기 희망을 본 것이다.

이중환은 사대부들의 치열한 정치 투쟁의 원인이 국가의 가난에 있다는 논지를 펼치며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와 백성이 함께 부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가난한 집에서 인심이 날 수 없는 것이고 신선의 말 같은 유교의 고담준론만으로는 결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충청 땅에서 신이 내려준 땅으로 3곳을 꼽았다. 연기 전의와 유성펄(대전일대) 그리고 유마곡(유구 마곡사) 그리고 내포다.

ㅡ 거대령 사이를 작천이 서로 열리고 닫히며 흐르다 목천과 연기 사이에서 그치는데 이 부근의 산색이 아름답고 들판이 서로 싸고돌아 감여가(풍수)들이 사람 살기에 적지라 한다.

이중환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의 조건으로 평탄한 지형과 교통로 그리고 조운(뱃길)의 조건을 우선 든다. 연기 전의 지역은 이런 점에서 강점이 있다. 작천의 풍부한 수량과 인접한 금강의 존재 그리고 삼남을 연결 하는 접근성을 들어 살기 좋은 땅으로 꼽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그의 안목은 대단하다. 모든 이유를 떠나 250년 후 이 일대가 한 나라의 수도로 거론되며 급기야 행정 수도지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중환의 안목은 대전 지역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ㅡ 계룡산 남쪽에서 나온 물이 진산 옥계의 물과 합하여 갑천(甲川)이 되어 북으로 흐른다. 내의 동쪽이 회덕이고 서쪽이 유성과 진잠이다. 동서 양편의 산들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 안으며 북에서 서로 교차 하며 고리를 이루고 있어 산의 기상이 깨끗하고 배어나다. 특히 들의 남족에 보문산과 구봉산이 적당 하여 한양(동교)에 못지않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최고의 땅으로 대전 일대를 주저 없이 꼽는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과 갑천의 길고 풍부한 물 그리고 지역의 남쪽을 지키는 보문산과 구봉산의 안정된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 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중환이 지적한 이 일대가 훗날에 충청도의 수도가 되여 발전을 했고 아이티 산업 단지와 연구도시로써 성장 한국의 5대 도시로 성장한 것을 보면 그의 예언이 신안(神眼)이라 할 만 하다.

이중환은 택리지 전편에서 지리와 인간의 삶의 모습을 기록 하면서 풍수론을 기초로 사용한다. 알다시피 조선 사회에서 풍수론은 사회의 지배 이데오르기였다. 이중환도 이곳에서 자유 로울 수 없었다. 택리지는 지리지라는 성격에 물상과 상업이 자연스럽게 담긴 250년전의 보고서다.

이중환은 내포를 주시했다. 그는 이 지역을 한달여 발품을 팔며 취재를 한다. 내포(內浦)는 안으로 들어온 포구를 말한다. 내포는 삼국사기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도 깊다. 충청의 서쪽 지역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거산과 아산만으로 향하는 삽교천 무한천등의 큰 하천과 해안에 인접한 탓으로 바닷물이 골속 골속까지 들어와 뱃편이 경기도와 한양 그리고 호남으로 열려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ㅡ충청도는 내포가 최고다. 공주에서 2백리 길이고 가야산과 주변으로 크고 작은 들판이 있다. 들에 포구가 있는데 유궁진이다. 이 지역 열 고을이 내포다.

이중환은 내포를 가야산 일대의 열 고을이라 단정 한다. 덕산 면천 신창 결성 홍주 해미가 원 내포고 주변은 내포주변 으로 본다. 이중환은 내포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낀 모양이다. 내포는 충청의 명산인 가야산과 중심으로 평야와 해안 그리고 산록이 어우러진 천혜의 지역이다. 내포는 일찍이 이런 천혜의 지역적 특성으에 충청의 곡창이자 한반도의 곡창으로 기능했다.

이중환은 충청의 중앙 내륙과 동북쪽을 다녀 온 후 내포 여행에 나섰다. 그는 내포의 장점을 삼남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바다를 통한 교통의 발달을 꼽았다. 삼남대로는 교통의 강점이 있는 반면 국가 위난시 전쟁등의 참화를 직접적으로 받는 약점이 있다. 내포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가야산에서 부터 내포를 풀어 간다. 수군 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오천에서 영보정을 보고 만과 해안의 경치를 보며 결성 해미를 거쳐 안면도까지 들어간다. 가야산 서쪽에 있는 세 고을이 바로 이 고장이다. 북쪽으로 태안과 서산이 있다. 이중환은 태안에서 바다 건너 강화도를 생각하고 면천 당진을 거쳐 포구에서 배를 얻어 타고 아산으로 온다.

내포는 할 이틀 사이에 돌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지역을 돌아 보는데만도 족히 보름은 걸렸을 것이다. 아산은 백제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아들 비류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착륙했던 약속의 땅이다. 이중환은 마한과 백제의 근원이 충청도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중환은 공주에서 유구역을 거쳐 차동을 넘어 예산에 거쳐 내포에 들어갔다 했다 예산에는 거상들이 있고 큰 객주와 시장이 선다고 했다. 예당평야와 조선 제일의 인공호인 예당호가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 할까. 예산은 지금도 주 5일장이 아니라 주 5일에 두 번 장이 서는 전국 유일의 곳이다.

내포는 근원은 유궁진이다. 한양과 무상으로 열려있는 뱃길이 예당 평야의 앞마당에 닿은 곳 에산은 충청도의 1번지다.

다음편 홍주 천년에 대하여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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