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칼럼] 홍경래를 생각한다
[이청의 충청역사칼럼] 홍경래를 생각한다
  • 충남투데이
  • 승인 2019.07.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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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쓰여진 소설 홍경래전은 서두를 이렇세 잡아 나간다.   이 소설속에는 홍경래가 지은 시를 한편 수록하고 있는데 홍경래의 문력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다복동은 가산 박천 사이에 버드나무잎 같은 곳입니다.   좌로 우로 험하지 않고 울창한 숲과 아득한 산비탈이 아늑한 곳이었지요.   마을 뒤로 한양 의주길이 열려 있고 앞으로 '대령강'이 흐릅니다.

아 골짜기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그래도 이십 리 길이 족하고 안과 바깥이 한적하고 길까지 좋으니 숨기에나 나타나기에나 모두 편한 곳입니다.  달은 많은 별들을 거느리고  바람은 나무잎을 몰고 가을산에서 싸우도다.

月將衆先屯霹落  風驅木落戰秋山  정치는 역사공동체가 당면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정치도 생활이고 환경이다.  정치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복리민복을 대의로 한다. 그것이 명분이고 형식이다. 어느 시대의 정치도 그것을 거스른 적은 없다.

시대를 거스르던 희대의 독재자들도 말로는 세상을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덕목을 세우곤 한다.

정치는 한 시대의 삼정오사(三政五社)가 만나는 바다다.   행정 군사 당파가 이끌어가는 세계는 언제나 부조화와 갈등한다.

높은 이상과 아름다운 선도의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행군당(行軍黨)의 삼두마차 앞에는 언제나 탄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정이 이끌어가는 깃발 아래의 이상의 구두탄에 도무지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혁명이나 반란으로 마차를 세우려 한다.

홍경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홍경래는 정조와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18세기 조선의 문(文)과 김조순 박종경으로 대변되는 동시대의 작폐에 제동을 건 사람이다.   18세기는 학군 정조와 학자 정약용이 이끌던 문풍의 시대다.   동시에 김조순 박종경으로 대변되는 세도정치의 태동시대다.

홍경래는 이 시대의 반동이다. 홍경래의 거사는 정조말 순조초기의 사건이다.

홍경래는 정조말기를 증오했다.  도무지 세상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홍경래의 신념이 발동한 시기다. 홍경래는 정조말에 이미 삼십대였다.

홍경래는 야망의 사내였다.  홍경래는 십년 이상 사람을 모으고 재물을 모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때가 왔다고 믿고 거사를 단행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수만 명의 사상자와 한곳에서 이천 명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 생긴다.   조선은 매년 말이면 호조에서 팔도의 헌민수(백성의 수)를 보고한다.   1809년 순조에게 보고된 헌민수는 평안도 66만이다.

그러나 1812년의 평안도의 헌민수는 40만으로 줄어 보고된다.  엄청난 인구의 감소다. 필자가 본 당시 평안도민 중 사만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평양도의 산업파괴는 엄청났을 것이다.  조선은 함경도를 복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함경감사 정만석의 활약이 돋보인다. 정만석은 불과 수년 만에 평안도의 살림을 복구한다.   김조순은 평양에 단군사당과 기자사당을 새로 건축하여 지역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한편 평양도민 중에서 당상관을 특채하는 등 발 빠른 회유책을 통해 지역민심을 돌려놓는 수완을 보인다.  홍경래의 마지막 저항지 정주성이 항복하던날 토벌대장 윤효원은 조정에 이런 보고서를 올린다.

성민 2983명을 생포하고 여자들과 10이하 남자아이를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참수 했다며 전공을 자랑한다.   단군이래 국가가 자국민을 이런식으로 도륙한 일이 있었는지 놀랍고 통탄스런 기록이다. 윤효원은 정조임금이 키운 무장으로 장용영 대장 출신이다.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보며 다시한 번 홍경래를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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