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광복군 두릉윤성 전투고 1-2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광복군 두릉윤성 전투고 1-2
  • 이 청
  • 승인 2019.07.0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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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들은 연초에 강가에 나와 왕과 신하들이 모여 놀다가 강을 사이에 두고 백성들을 나누어 돌팔매질을 하며 놀았다.

왕과 대신이하 백성들이 모두 나와 투석전을 하며 놀았다는 기록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전쟁 연습을 했다는 것을 말한다.

석전은 활과 화살과는 달리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 경우며 이를 통해 놀이와 군사 훈련을 동시에 꾀한 고대의 정치력의 일면으로 이해가 된다.

석전은 단순 하게 돌맹이를 던지는 것으로 이해 하면 않된다. 돌을 던지는 것에도 망패. 망 팔매. 줄 팔매등 여타의 기구를 이용한 여러 기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석전은 우리가 생각 하는 이상으로 전투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61년 3월 10일 품일장군이 이끄는 신라군 5만이 두릉윤성의 남쪽에 진을 친다. 두릉윤성의 남쪽은 목면 지곡리 문성 초등 학교가 있는 넓은 벌판이다. 신라군은 진지를 정비 하기도 전에 성문을 열고 기습을 해온 백제군에 혼비 백산 하여 군대를 고사비(古沙比)성으로 물린다. 고사비성은 두릉윤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신라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하고 이로부터 38일간의 결전이 벌어 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인 이 기록은 두릉윤성의 특정을 위하여 매우 중요 하다. 두릉윤성을 주장 하는 금산설과 부안설은고사비성을 설명 하지 못한다. 목면 지곡리 두릉윤성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4키로 지점에 신흥리 토성이 있다. 백제 시대의 토성으로 보고된 곳이다.

신흥리는 웅진에서 사비로 가기 위한 교통로로 사비 천도시 물자 수송과 병력의 휴식등을 위해 유용했을 성이다. 사비에 천도를 완료한 백제인들이 옛사비라 불렀다 하여 하등 이상 할 것이 없다.

두릉윤성과 고사비성의 기록을 마추기 위해 백여리 정도 떨어진 성들을 억지로 끌어다 논지를 전개 하는 여러설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두릉윤성의 방어군은 높은 지형을 이용 하여 화살과 돌을 이용한 역공격으로 맞대결을 펼쳤을  것이다. 공격군과 방어군이 쏘아 대는 화살과 돌은 글자 대로 시석여우였을 것이다. 화살과 돌 세례로 하늘의 햇빛도 차단될 정도였을 것이다. 막돌은 별 쓸모가 없기에 오래간다.

두릉윤성은 완만하고 숲이 적당한 토산이다. 투석기와 돌팔매를 위한 적당한 돌을 일시에 다량으로 확보 하기 위해서는 적당치 않은 곳이다. 산아래에서 부터 성문으로 오르며 기슭을 자세하게 살펴 본다. 조금만 주의를 해 보면 산에서는 보기 드문 강 자갈이 눈에 뛴다. 두릉윤성에서 불과 1키로 지점에 커다란 하천이 흐른다.

그곳에서 투석을 위한 강 자갈을 끌어 모았을 것이다.

전투는 장장 38일간을 계속 한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 부흥군 항전의 최고 최대의 전투 기록이다. 이런 전투를 겪은 이 주변 지역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성이 함락 되고 나라는 망국이 되었지만 이날의 항전기는 고스란히 지역에 남아 음력 정월이면 이 지역민들이 모여 봉화 놀이와 더불어 투석전을 하며 이날을 기렸다.

산동지역(칠갑산 동쪽 4개면)은 장승제와 우물제가 자연 부락 단위로 전한다. 민속을 연구 하는 전국의 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불과 30년전까지 거칠고 악날(?) 하기까지한 투석전이 있었다. 미당리와 지곡리간의 3일간을 계속하는 투석전이었다. 양 마을은 마을 경계인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음력 보름을 앞두고 투석전을 벌였다. 이날의 행사를 위하여 양 마을은 설을 세러 내려온 청년들을 붙잡아 둘 정도였다.

마을의 1년 동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린다는 의미의 투석전은 불 깡통과 돌맹이의 난사등으로 거의 전쟁을 방불 했다. 머리가 깨지고 다치는 사람이 속출 했다. 그런데도 행정이나 경찰도 제지를 하지 못했다. 워낙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의 열의와 믿음이 강했던 탓이다.

투석전은 이 곳은 물론 인근에 모두 해당 했다. 다만 강도면에서 약했을 뿐이다.

고려사에는 안동 지역에서 투석꾼을 모아 부대를 편성 했던 기록이 있다. 투석전은 평양의 대동강과 고려의 안동에도 그리고 두릉윤성 아랫 마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마을간의 투석전은 중앙대 민속학과 임동권 교수가 잘 정리를 해 놓았다. 그는 이지역의 투석전의 의미를 외침을 대비 하기위한 산간 지역의 자체 방어 차원으로 이해를 했다.

당시 투석전에 참여를 했던 충청투데이 청양 주재 기자인 이진우(52)는 주먹만한 돌 3개를 한번에 2백미터 정도로 날려 보내던 사람도 있었다 증언을 한다. 줄 팔매라는 돌던지는 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로 가공할 전투력(?)이다.  다시 661년의 3월의 공방지로 간다. 신라군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갈고리를 성벽에 걸고 성위로 기어 올랐을 것이다. 성아래와 성위에서는 엄호와 제지를 위한 화살과 돌덩이가 난분분 뿌려졌을 것이다. 칼과 창이 성위에서 부딧치고 도끼가 사람과 사람의 머리를 들이 쳤을 것이다. 이 전투는 신라에 충격을 준다. 성을 함락 시키고 성과 주변을 초토화 시킨 것은 물론이다.

이 기록을 삼국사기는 농사가 전폐 되고 해골이 들판에 굴렀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는 이 곳에 신라 9정인 군사령부를 설치 하고 다시는 저항 하지 못하도록 의기를 꺽는다. 신라 9정이 이곳에 설치 되었던 배경도 두릉윤성의 특정을 위한 좋은 자료다.

이후 이 지역은 철저 하게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아늑한 시간이 지나고 한 정신 나간 작가가 역사의 저 끝에서 사라진 한 점 흔적을 잡고 몸부림 치고 있다. 이 두릉윤성을 놓고 2백자 원고지 한장을 쓴 역사 학자가 단 한명도 없다. 겨우 대전보건대 박물관학과의 심정보 교수가 '백제부흥군거점에 관한 연구'에서 두릉윤성(정산)이다 한줄을 언급 한것이 전부다.

두릉윤성.
그대는 어쩔것인가. 나는 지금 두릉윤성 아래에서 시석여우 하던 그날을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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