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광복군 두릉윤성 전투고 1-1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백제 광복군 두릉윤성 전투고 1-1
  • 충남투데이
  • 승인 2019.07.0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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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검술은 한 손 검법이 주류다.

조선 중기의 무예도보통지에 전하는 본국검법은 두 손을 다 사용 하는 검법이다.삼국시대 특히 백제의 검법을 한 손 검법으로 단언 하는 이유는 백제 전역에서 발굴되는 환두대도에 이유가 있다.

환두대도는 손잡이 끝이 둥근 모양의 고리 형태를 하고 있어 그리 이름한 것이다.환도대도는 두 손을 사용 하여 시전하기가 용이 하지 않다. 그리고 칼의 길이도 비교적 작다.

이를 유추 할 때 환두대도는 검과 방패 또는 쌍검의 형태로 사용 되었고 특히 기마병이 주였던 당시의 전투에서 마상에서의 사용이 편리 했다고 여겨진다. 쌍도술의 유추는 환두대도의 출토지에서 장검과 중검이 함께 출토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모자도(母子刀)의 출현은 당시 무사들이 한 손 검법은 물론 쌍도술까지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연개소문이 5도를 차고 다녔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 한다. 무예도보통지에 전하는 신라 화창랑의 검무기록은 삼국 시대의 검술의 실체를 들어낸다.

그중에서도 백제의 그것은 더욱 현실감이 있다.  백제에는 위사(衛士)가 정식으로 존재했다.

백제 6좌평중 위사 좌평이 그것인데 위사는 말할것 없이 군왕의 호위 부대이다.

왕을 지근에서 호위 하기 위해서는 간편하고 치명적인 무기와 그것을 다루는 술법이 필연적이다.

백제는 군왕의 옆에 위사부를 두고 책임자로 좌평을 임명 하여 우대 했다.  환두대도는 찌르기 보다는 베기가 용이 하다. 특히 손을 보호 하기 위한 검코가 없는 것은 환두대도가 마상이나 접근전의 활용도를 놉히기 위한 것임을 말해준다.

백제는 단병접전과 수성(守城)전을 중시 했다. 백병전이 단병 접전이라면 수성전은 상대적으로 원거리 전투다. 수성전은 원거리 전투를 돕기위해 원사(遠射) 무기의 발전이 필요하다.
활. 쇠뇌. 투석기등으로 알려진 원사무기의 활용과 더불어 돌팔매가 유용 하게 활용 된다.

투석기는 대형 화살을 날리는 쇠뇌와 다발의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 보다는 간편 하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했고 현실성도 있다.

-시석여우(矢石如雨).

화살과 돌이 비오듯 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곳곳에 보이는 전투 종군 기사로 백제를 포함한 삼국의 공공연한 전투 양상이다.돌을 깨어 투석기로 날려 보내는 한편 손을 이용 하여 던지는 단순 무식한 전투술이 매우 폭넓게 활용 되고 있었던 것이다.

투석전의 기록이 수서(隨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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