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김옥균 최후의 날 출생지 종지부를 찍자
[이청의 충청역사 칼럼] 김옥균 최후의 날 출생지 종지부를 찍자
  • 충남투데이
  • 승인 2019.07.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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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은 반드시 오는 법 조급한 마음은 버려야 한다네.
(來日庶可追. 毋爲空躁躁)

풍운아 김옥균의 고향은 천안이다. 공주도 대전 이사동도 옥천도 아닌 김옥균 본인의 입으로 저의 출생지는 충청도 천안입니다. 하고 임금께 육성으로 말했다(승정원일기) 이 것으로 더 이상 김옥균의 탄생지 논쟁의 종지부를 찍자. 사실 역사적 위인의 고향 운운은 얼척 없는 짓이다. 위인은 그저 한국인이면 족하다.   자객 홍종우의 총탄을 받고 중국의 한 여관에서 죽은 김옥균의 마지막 모습을 리얼하게 기록한 자료는 '중동전기(中東戰記)'다. 이 자료를 읽은 매천 '황현'은 자신의 문집 속에 김옥균의 마지막 모습을 생동감 있는 필체로 기록해 놓아 마치 영상을 보는 듯 하다. 홍종우는 저녁무렵 김옥균의 방에 들어갔다. 김옥균은 서쪽을 보고 방의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홍종우는 일본 하인 '북원(오가사와라 소년)'을 심부름 보낸 후 불시에 총을 쏘았다. 첫발은 김옥균의 얼굴 오른쪽 뺨을 비켜 정수리 쪽으로 맞았다. 선혈이 뿜어져 나왔고 김옥균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두번째 총탄은 가슴 왼편을 뚫고 오른쪽으로 나왔다. 세번째 총탄은 좌측 어깨죽지를 뚫었다.

(金方晝안眠西窓 口藤繕 洪揮今北原出外 突出手陷轟擊 初中其左頰 彈由頰斜穿而上 直達嶺門之左鮮血噴薄 痛極狂嘶 洪復擊以在彈 由胸之在旁 人橫穿過右 未透皮膜 第三彈中左肩胛初復) - 매천야록 1894년 12월12일자.  홍종우는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와 순식간에 영웅(?)이 된다. 살해를 당한 김옥균은 노량진 백사장에서 다시 한번 죽음을 맞는다. 시체를 앉혀 놓고 목을 베어 장대에 거는 참수제효(斬首祭梟)에 처해진다. 머리가 잘리고 난 후 김옥규의 몸통의 배를 갈라 간을 씹은(柳在賢子某剖腹啖其肝) 사람이 있다. 환관 유재현(柳在賢)의 아들이다. 유재현은 갑신정변의 와중에 김옥균 세력의 칼을 맞고 죽은 사람이다. 유재현의 아들이 그 아비의 복수를 한 셈이다.

황현은 김옥균의 간을 씹은 유재현의 아들을 무덤덤하게 기록하며 중전 민씨의 코멘트를 한줄 언급한다.  “민씨의 자식들은 무엇하나?”  황현은 김옥균을 기록하며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다. 호불호가 분명한 황현의 모습으로 볼 때 의외다. 황현은 대역죄인이 맞다는 말과 김옥균이 정국을 잘 마무리 했더라면 하는 기대도 있다(使當甲午之局 其施조惜必多可觀)는 양시론을 전개한다. 환관 유재현의 아들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유재현의 손자는 유명(?)한 사람이다.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이다. 할아버지가 유씨이고 손자가 이씨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의 환관 내력은 양자를 들이며 양자의 성씨를 인정하는 법이 있었다. 이병직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활용, 문화재 수집에 공을 들여 일본 수집가들로부터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낸 공로가 있다. 그의 노력 속에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날 노량진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간까지 도려내진 김옥균의 몸통은 한강에 버려진다. 두 다리는 말꼬리에 매달려 조선팔도로 조리가 돌려진다. 고종은 속이 시원하다 했고, 중전 민씨는 손뼉을 치며 축하의 연회를 베풀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충과 역도 이렇듯 허망하다. 조변석개하는 세상의 인심 속을 살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꿈을 꾼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실감한다.  풍운아 김옥균, 그는 이국땅에서 죽어 고국으로 돌아와 시신의 훼손은 물론 자신의 간까지 사람에게 먹힌(?)다.

김옥균은 세상에 의문을 품었고 그가 즐긴 바둑에도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다. 김옥균스토리와 일본에게 묻는 바둑 등 그간 열 꼭지의 김옥균 에피소드를 마친다. 그리고 김옥균을 생각하면 역사읽기가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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