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동부보훈지청 만세운동 알리기 두번째 : 세종시
[충남] 동부보훈지청 만세운동 알리기 두번째 : 세종시
  • 이지웅 기자
  • 승인 2019.03.2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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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계기 특집

△ 전의면

신정리 주민 이수욱(李秀郁)이 고종의 인산에 참예차 상경했다가 3․1행사를 구경하고, 3월 6일 귀향해 동리의 추경춘(秋敬春)과 모의하고, 7일 밤 동리 박성교(朴聖敎) 집에서 추득천(秋得天)·윤자벽(尹滋壁)·윤상원(尹相元)·윤자훈(尹滋勳)·윤상억(尹相億)·김재주(金在周) 등과 3월 13일 전의 시장 장날에 거사하기로 합의했으며, 다음 8일 밤에는 김병오(金炳五) 집에서 이장희(李章熙)·이광희(李光熙)·정원필(鄭元弼)과도 같은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이수욱은 목판(木版)으로 태극기 약 150매를 만들어 거사일인 3월 13일에 전의 시장의 통로인 신원리의 갈정마을(葛井洞) 고개에서 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장에서 연설을 한 후 일일이 거사를 약속받고 옷 속에 감추어가게 했다.

이리하여 하오 0시 40분경 이수욱이 시장에 이르러 군중에게 일장연설을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수양(李秀陽)을 포함한 군중들은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일제히 이에 화창·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시장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이에 대해 일제 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조치원에서 급거 출동한 철도원호대원 20명이 합세해 주동인물 8명을 구금했다.

이로써 이수욱·추경춘·추득천·윤자벽·윤상원·이장희·이광희·이수양 등이 체포되어 모진 고통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들은 초심·복심에도 불복하고 상고하며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 전동면

3월 15일 수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 북면 조치원 시장

고종 인산 참예차 상경했다가 3․1시위에 참가했던 조치원청년단의 맹의섭(孟義燮)·김재형(金在衡)·이은식(李殷植)·전병수(全炳壽) 등과 김규필(金奎弼)·천종구(千種九) 등이 구 한국 시종원주사(侍從院主事)를 지내고 지방의 추앙을 받던 홍일섭(洪日燮)을 추대해 거사를 계획하고, 3월 30일 아침 조치원 시장 입구에서 장꾼들에게 독립시위운동 전개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하오 2시에 태극기를 들고 홍일섭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보러 온 장꾼들이 이에 합세하고 읍민들이 동원되어 시장 안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동안 연기청년회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군중을 인도하며 맹활약을 했는데, 조치원 헌병분견소원과 주둔 수비대원들이 출동하고 총개머리로 군중을 난타해서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김규필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구타당했으며 전병수는 총개머리로 머리의 앞뒤를 심하게 맞았다.

피검자도 수십명에 이르렀는데 <매일신보(每日申報)> 지국 기자 맹의섭, 이장 변해조, 지방부호 오진표는 일인 면장 및 헌병분견소장과 교섭해 태형을 중지해 주면 다시는 만세를 부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홍일섭을 제외한 모두를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 금남면

3월 23일 대평리(大平里) 시장의 장날 수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맹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운동은 임헌규(林憲奎)가 발의하고 임병주(林炳周)·이덕주(李德周)·김봉식(金鳳植)·임순철(林荀喆)·임헌빈(林憲斌) 등이 주동했는데, 임헌규는 이날 선두에서 지휘하다 일제의 구타로 빈사상태에 빠지고 귀가해 치료를 받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4월 2일 대평리 시장의 장날에 3백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하다 8명이 적 헌병에게 검거되었다.

△ 남면 연기시장

4월 3일 연기리 시장에서는 4~5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했고, 4월 20일에도 수백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 각처의 봉화시위

3월 23일 밤 북면(현재 조치원읍)․서면(西面)․남면(南面) 3개 면의 10여 개 리에서는 인접한 충북 청주군 면들과 호응하여 수천 명이 참여한 대대적 횃불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청주의 강서․강회 양면민들이 밤 9시부터 10개소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조치원으로 내려왔는데, 조치원 부근의 군중이 이를 맞이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해 조치원 헌병분견소의 일제 헌병들이 소방대 및 철도원호대와 함께 경계를 폈다.

3월 26일 동면 응암리 주민들이 고목골 뒷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이 운동은 청주군 강내면 사곡리민과의 연락 하에 이루어졌다. 북면에서는 밤 8시경부터 횃불시위를 하다가 청주군 강내면 등의 횃불시위대 수천 군중과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3월 27일 동면의 예양리·노송리·송룡리 등 6개소에서 횃불이 올려졌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예양리의 의거는 장재기(張在基)가 솔선했고, 노송리와 송용리는 청주군 강내면민과의 연락 하에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밤 조치원 헌병분견소 헌병이 출동해 주동인물 8명이 체포되었다.

3월 28일 동면 송룡리 주민 10여 명이 산 위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이 운동을 주동했던 장홍진과 장기민은 평소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이었는데, 군내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순회 연설차 와서 강연하던 연기군수에게 “한국 민족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며 시비하고 돌아와 이날 밤 횃불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3월 29일에 전동면 청송리에서 약 20명이 내동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이 운동은 권혁기(權赫基)가 주동했는데, 그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날 밤 조치원읍에서도 횃불시위가 계속되었다.

3월 30일 서면 거의 전지역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기룡리의 경우에는 유진광(兪鎭廣)이 주동이 되어 다수가 뒷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그는 적에게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3월 30일 북면에서 하오 2시부터 조치원 시장의 대시위가 있는 후 3월 31일 밤에는 면내 각리에서 산 위에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여 기세가 수그러지지 않았다.

남면에서도 각 지역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방축리에서는 밤 8시경 약 30명이 황우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쉬도록 연호했다. 이날의 주동 인물로 임헌상(任憲祥)이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복통리에서는 밤 8시경 약 10명이 뒷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이에 박원칠(朴元七)이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다.

양화리, 진의리, 송담리 등에서도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의리의 김봉식, 월산리의 임영복, 양화리의 조의순과 임덕문은 이덕민 집에 모여 독립시위운동을 모의하고 양화리의 임덕화를 앞세워 1백여 명과 함께 아월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이들은 진의리의 임영철을 앞세워 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또 다시 송담리로 갔는데, 거기서는 벌써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이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이에 김봉식·조의순·임영복·임덕문·이덕민 등은 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4월 1일 남면에서 전일에 이어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송담리에서는 이날 밤 9시경 서운산 위에서 약 30명이 횃불을 놓고 약 1시간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 이 시위는 임희수(林喜洙)가 발의하고 임숙명(林淑明)·임만수(林萬數)가 주동했는데, 이들은 체포되어 모진 태형을 받았다. 갈운리에서는 약 150명이 대거 황우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고, 월산리에서도 다수가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밖에 전의면․전동면의 각 부락에서도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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